데미안

ㅣ저 자ㅣ 헤르만 헤세 (전영애 역)
ㅣ출판사ㅣ민음사
ㅣ발행일ㅣ2000. 12. 20
ㅣ페이지ㅣ239쪽

ㅣ정 가ㅣ

8,000원


사춘기 함께 한 ‘헤르만 헤세’ 소설들

홍성수

성남 연세이비인후과 원장

성장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 미완성, 미성숙 단계로부터 제 스스로 혹은 멘토의 도움으로 세상 풍파와 역경을 헤쳐 나아가면서 자신의 인격과 경륜을 갖춰 성인(成人)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장르다. 이는 중국의 무협소설과 형식을 같이 한다.

특히 서구에서는 르네상스를 지나 개인주의가 자리 잡은 이후 괴테를 비롯한 낭만주의와 질풍노도의 정신이 풍미했던 독일 문학에서 강세를 보여 왔다.

그중 근대 이후 성장소설의 으뜸은 아마 ‘헤르만 헤세’가 아닐까 싶다.

1970년대 초반 중고등학생 시절, 처음 읽은 그의 대표작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그리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예전에는 ‘지와 사랑’이라는 호소력 있는 일본식 제목으로 출간됐다)라는 제목만 떠올려도 쉰 중반인 지금에도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시인이며 동시에 화가,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유럽 정신의 위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롯된 문화 활동과 노년의 은둔, 그리고 특히 유럽 정신의 위기에 대한 대안, 혹은 보완으로서의 불교와 노자, 장자 같은 동양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심취 등 헤르만 헤세라는 개인의 궤적만으로도 흥미롭다.

학교폭력에 시달리기까지 하지만 신비로운 인물 데미안이 고비마다 알게 모르게 관여하면서 마침내 구태의 ‘알을 깨고 나와’ 의젓한 성인이 되어가는 싱클레어.

삶의 무상을 느껴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나락인지 구도인지의 길에 나서 결국 인생이란 선과 악도, 옳고 그름도, 시작도 끝도 없이 득도, 성불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노력하는 그 과정이란 진리를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관조하게 되는 싯다르타.

감성과 이성, 땅과 하늘, 여성과 남성, 예술과 철학, 열정과 냉정, 욕망과 참회 등의 대비를 통해 치열한 삶은 살았다면 결국 어느 길로 가던 인간 정신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경지는 숭고하다는 골드문트.

어린 시절 멍하게 책 내용을 되새김하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버린다거나, 거리에서 지나가는 아무한테나 염력을 시험해 본다거나, 정처 없이 몇 시간 서울 거리를 무작정 걸어 다닌다거나, 불교와 노자, 장자 관련 서적에 몰두한다거나, 어느 정도 동성애적인 우정이나 끊임없는 육욕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혼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방망이질 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세 명의 주인공을 부러워하며 동일시 하기도 하고, 동시에 나에게는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길 바라기도 하는 혼란, 그 자체다.

사춘기 그 나이 때는 다 그런 것이고,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당장의 해결할 길 없는 혼란과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 없이 어찌 사춘기라 할 수 있을까?

그 혼란과 불안, 그리고 나름대로의 극복이 그나마 오늘의 필자를 있게 한 밑거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군의관 시절에, 그리고 40년이 지난 작년에 위에 언급한 소설 세 편을 다시 읽었다. 당연히 감흥은 훨씬 무뎌지고, 행간에서 건져 올리는 의미나 느낌도 많이 달랐다.

하기사 그 다름이 얼마나 다른지 궁금해서 읽어 본 일인데, 아마 다시읽을 일은 없을 듯 싶다.

혼란과 불안이 사춘기 적에만 문제일까? 다만 그 동안 익숙해지거나, 무감각해졌거나, 외면했거나, 세속적인 궁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나날들도 역시 그 와중에서 고민과 성찰과 반성을 하며, 지성과 사랑으로 나아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자각이 쉰 중반에 헤세의 세 편의 소설을 삼독(三讀)한 수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