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만의 이상한파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 2월 말에 가까워지면 무기력증, 권태를 느끼게 된다. 새해의 서장을 여는 기쁨도 사라지고, 지루한 겨울을 견디며 새봄마저 기다리기에는 2월은 어정쩡한 세월이다. 30일도 못되는 짧은 달 여전히 춥고, 신바람 나는 일도 별로 없다. 없으니, 투덜대고, 긴장도 풀리고, 지루해지고, 불청객 감기는 환절기 큰 손님이다.

2월은 황량한 추운 겨울의 벌판 같은 간절기다. 랠프 에머슨은 무기력하게 헛되이 보냈던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인간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내일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오늘 하루가 내 인생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도록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올 찬란한 봄꿈을 꾸면서 겨울을 보내자.

2월 4일은 입춘(立春)이었다. 입춘은 왜 한자로 ‘들일 입(入)’자의 ‘入春(입춘)’이 아니고 ‘설립(立)’자의 ‘立春(입춘)’이다. 입춘(立春)은 그저 ‘봄기운이 들어섰다’는 뜻일 뿐이다. 결코 ‘봄이 시작되는 날’이 아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24절기는 고대 중국 황허강 주변, 화베이(華北)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화베이 지방 위도는 북위 34.8도다. 우리나라 제주도(33~34도)와 부산(35도)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은(37.6도) 훨씬 북쪽에 있어 입춘 날 봄을 느끼지 못한다. 봄이 와도 도무지 봄 같지 않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회자된다. 기상적으로 봄은 ‘하루평균 기온이 5도가 넘을 때’를 말한다. 최근 30년간 우리나라에서 하루평균 기온이 5도를 넘긴 날은 3월 12일이었다니 입춘이 지나서도 36~37일이 더 걸린 셈이다. 서울은 입춘지나 39~40일 지나 3월 15일 되어서 5도를 넘겼다. 부산은 입춘 뒤 7~8일 지나 5도를 넘겼다. 부산의 봄은 2월 11일이나 12일쯤 찾아온다는 계산이다. 서울은 지난 30년간 입춘 평균기온은 영하 2도였다니 봄을 느끼지 못할 것이요, 올해 제주도는 5.2도였고, 유일하게 제주도에만 봄이 찾아왔다.

입춘(立春)은 24절기 가운데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절기다.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 우리 조상들은 이즈음 대문이나 문설주에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글귀를 써 붙이고 한해의 복(福)을 기원해 왔다.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터진다’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속담처럼 혹한이 맹위를 떨쳤다. 2월 2일 서울지역 기온은 55년만의 최저기온 17.1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유럽 ‘살인한파’를 비롯해, 미국, 중국, 일본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전 지구촌은 혹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왜 추위가 갈수로 심해지는가. “지구 온난화는 ‘기후’의 문제이고 추위는 ‘날씨’ 문제이지만 지구온난화가 기후 자체도 변하게 하는 일종의 변수가 되고 있다. 기상청은 지난 40년간 한반도는 1.4도 기온 상승이 있었는데 앞으로 10년간 이에 못지않게 기온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의 겨울 자체가 한 달 정도 짧아지게 되지만 겨울 추위 강도는 훨씬 강력해졌다.

올 들어 심해지는 한파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북극의 빙산이 많이 녹으면서 북극에 있던 찬 공기가 내려오는 주기가 달라지고 있다. 겨울철 북극에 존재하고 있는 찬 공기의 소용돌이(한랭와ㆍ寒冷渦)가 강할 때는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약할 때는 추워진다. 최근에는 이 소용돌이가 많이 약해지면서 북극진동(北極振動)으로 극지방의 차가운 공기가 상층 기압골을 따라 미국, 동유럽 및 동아시아 지역의 중위도 지역으로 남하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연일 맹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삼한사온(三寒四溫)은 전통적으로 한국의 겨울날씨를 대표하는 말이다.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대륙고기압의 확장 주기에 따라 한파와 날씨가 풀리는 기간이 3일과 4일 이어지는 현상 때문에 생겨났다. 지난해에는 ‘29한2온’이란 말이 나왔다. 대륙 고기압의 팽창과 수축주기는 계속 유지되지만 지구 온난화 탓에 북극진동으로 인한 한파가 밀려 내려오는 경향이 겹치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시베리아 방면의 고기압이 커지면 추워졌다가 몽골 방면에서 저기압이 생겨, 남으로 내려오면 추위가 풀리는 현상으로 삼한사온을 풀이하였다. 삼한사온이란 용어는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지만 그 기원을 찾기 힘들다.

조선중기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글 속에 작년의 기후가 무척 추웠다면서 “삼한사온이란 이야기는 역시 믿기 어렵다.”고 썼다. 조선 숙종~영조 때 문신 희암 채팽윤은 “극심한 추위가 4일째를 지나니 삼한사온의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썼다. 강화학파(江華學派) 저촌(樗村) 심육은 “겨울 봄 대개 맑고 온난한 날 적으니 / 삼한사온 믿지 못하겠네”라고 읊었다. 심육은 봄추위(春寒)를 읊은 것인데 “춘심은 무슨 일로 또 추위를 재촉하는가”란 내용으로 추위가 심했음을 짐작케 한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은 “추위가 사흘 넘으면 불평했던 선조들은 삼한사한(三寒四寒)이 아니면 삼온사온(三溫四溫)인 오늘날의 이상기후를 이해하지 못할 듯하고, 더구나 100년 후에는 이 나라가 아열대 기후로 바뀐다는 분석에 있어서야…”

유난히도 긴 겨울 우리 유년시절 추웠던 겨울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명 바지저고리는 오늘날 ‘고어텍스’였다. 목화 천연솜을 두둑하게 넣어 누빈 바지 방한복은 지금도 새벽 산책할 때 즐겨 입고 나선다. 두엄박처럼 둔하지만 따뜻한 솜바지는 온풍기보다 더 좋은 천연 방한복이었다. 보자기로 책을 싸서 어깨춤에 메고 벌판을 가로질러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정겨웠다.

아침밥 지은 부엌 부뚜막에는 손자 손녀들의 신발이 올라앉았다. 따뜻해진 신발은 할머니의 정성이셨다. 이 추운 겨울 서울거리를 걷거나, 진찰실에서 여성들은 양털로 만든 부츠를 신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옛날이 그리워지고 할머니의 정성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향사의 계절이다. 따뜻했던 계절도….

양털부츠의 원조 브랜드는 ‘어그 오스트레일리아(UGG Australiaㆍ어그)’다. 가운데 G가 조금 커다란 ‘UGG’로고의 ‘바로 그 신발’이다. 우리나라에서 어그 브랜드가 양털부츠의 대명사로 통칭된 건 2004년 TV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임수정이 신고 나왔다. 빨간색 코트에 검은색 어그부츠를 신고 나서면 ‘영의정 패션’이라 놀렸다. 투박하고 뭉툭한 부츠는 어떤 세련된 외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남자들이 싫어하는 여성 중 하나가 ‘어그 신은 여자’라는 말이 있었을까. 거리에 멈춰 서서 세어보니 대략 10명에 6명 꼴이란다. 캐주얼에서 정장까지, 입은 옷에 상관없이 발끝은 모두 양털부츠다. 양털부츠는 발빠르게 한국 여성의 발을 점령해가고 있다.

우리의 전통한옥은 방은 따뜻했으나 난방에 취약해, 대접의 물은 하룻밤 지나면 얼어버리기 일쑤였다. 밖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겨울 추위를 동장군(冬將軍)이 찾아온 모양이라고 몸을 움츠리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동장군이 찾아왔나!

이정균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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