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성탄절 일요일 새벽 4시에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개인병원에서 응급제왕절개수술을 시행한 후 자궁 무력증으로 대량 실혈을 한 산모가 이송되었으며, 병원도착 당시 맥박이 분당 170회로 증가되어 있고 혈압이 잡히지 않으며 도착 후 산모는 자신의 이름 한 마디를 한 후 이미 의식이 없어졌다고 한다.

즉각적인 자궁적출술의 준비를 지시하고 시속 120km로 온갖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운전을 하여 10분 만에 병원 수술장에 도착, 산모의 출혈성쇼크의 원인인 이완된 자궁을 제거하자마자 환자의 활력징후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 산모는 운이 매우 좋다. 개인병원 산부인과에서 분만 후 대량출혈이 발생한 후 이송이 결정된 시점이 만약 교통정체가 있는 출퇴근 시간이었다면 산모는 이송 중에 앰뷸런스 안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와 같은 상황은 종합병원 산부인과 분만장에서는 매우 흔하게 발생하는 ‘일상’이며, 이러한 생사의 ‘일상’ 즉 산과적 응급상황에서는 단 수분의 지체가 산모 및 태아의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분만장은 응급상황이 일상
산부인과 전공의의 수련 과정은 이런 수많은 해프닝, 생사를 왔다갔다 하는 산모와 태아를 돌보는 과정에 있다. 그 수련 과정 동안 분만에 보람을 느끼고, 분만의가 되려고 결심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과대학생 시절에 생명 탄생의 순간에 감동을 느껴 산부인과 전공의를 선택한 젊은 의사들은 수련과정에서 분만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과 그 와중에 여러 의료 소송을 경험하면서 ‘분만’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 산부인과 의료시스템이 붕괴된 것은 불과 10년만에 발생한 일이다. 일본 역시 높은 의료소송의 위험성, High risk, Low return의 악조건 근무 환경 등으로 분만 가능한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분만 진료시스템이 붕괴되었다.

日서 산부인과 시스템 붕괴
일본 정부는 산부인과 의사 부족이 사회문제가 되자 2009년부터 분만 관련 뇌성마비에 대해 나라에서 100% 보상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의대생들 사이에 산부인과는 비인기과로 전락해 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현상이 이미 발생했다. 2010년 국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부인과 4곳 중 한 곳은 분만실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 2000년 1500곳이 넘던 분만 병원은 2010년 자료에 808곳으로 줄어든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항력적인 분만에 따른 의료사고의 무과실 보상에 대한 재원마련을 위해 50%를 산부인과 의사 (분만 병원)에서 부담하라는 의료분쟁 조정법의 시행령은 이미 일본처럼 산부인과 의료시스템이 붕괴되어 가는 현실에 그야말로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시행한 산부인과 전공의 설문조사에서 이러한 시행령이 실제로 시행될 경우 90%가 향후 분만을 포기하겠다고 답한바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를 시행하는 데는 약 50억~150억원의 예산이 소요된다고 한다.

일부 정부 관계자들은 “분만 한 건당 따지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라며 금전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금액 문제가 아니다. 무과실조차도 의료계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부의 자세가 문제이고, 분만 시스템을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 정부에 없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지금도 분만병원이 없거나 고위험 산모 및 태아의 진료가 되지 않아 지방에서 올라오는 산모들이 대형 대학병원에 쇄도하고 있고, 산과적 대량출혈로 이송되는 환자로 새벽에 불려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산과의사 자긍심 심어줘야
산부인과 의사로서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분만병원이 없는 의료소외 지역에서 위와 같은 산과적 초응급 상황에서 생명을 잃는 산모 및 태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오늘도 분만장에서 24시간 당직을 서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자긍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토대를 지켜주고 싶다. 그런데 과연 산부인과 의사가 자긍심을 갖고 아기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우리나라에 올 것인가? 누가 우리의 손자들의 분만을 받을 것인가?

<산부인과학회 의료분쟁조정법 TFT간사>

오수영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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