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을 인생의 정점(頂点)으로 하느냐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빈번하게 생각해 왔는데 구순(九旬·아흔살)을 정점으로 하기로 했다. 즉 구순 때까지 인생길을 오르고 그 후 부터는 내려가는 것이다. 구순을 인생의 정점의 해로 삼아 등산하고 그 후부터 하산한다는 이야기다.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신의 건강상태나 환경상황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일단 떠나게 될 날을 예정해 놓고 그때까지의 인생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에 관하여 말하려는 사람은 드물지만 절친한 친구들이 만나서 환담할 때는 화제가 되기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가상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필자의 경우 구순을 정점으로 삼고 있지만 100세 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최장 10년의 여생(餘生)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이 10년간을 어떻게 값지게 지내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가상적 여생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이지, 증명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앞으로 10년을 더 살겠다고 가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건강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한 10년이어야지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은 아무런 뜻도 없다. 건강수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10년 동안에 치매에 걸리거나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99 88’이라는 건배 슬로건과 같이 99세까지 팔팔뛰다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것이다. 100세 넘게 사는 것이 훌륭하고 값진 일임은 물론이지만 왠지 그런 욕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사람이 나이 들게 되면 지나온 일들을 되돌아보고 어느 정도로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부족하거나 불만스러운 점이 많았다고 느끼면 늙어서라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는 어떠한 상태인가? 크게 만족할 만 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인생을 걷고 정점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점에 관하여는 전에도 쓴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겠다.

여열(余熱)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직 다 식지 않고 남아 있는 열, 고열(高熱) 뒤에 남아있는 신열(身熱), 심한 더위 뒤의 남은 더위 등 여러가지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인생에도 여열이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이때의 여열은 “아직 다 식지 않고 남아있는 열”을 말한다. 구순이 되기까지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구순 즉 인생의 정점을 넘어서도 아직 열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염치없는 이야기이지만 인생의 정점을 향해서 올라가는 동안에는 내 나름대로 노력도 했고 땀도 흘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어려울 때도 많았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정점까지 오르는 동안에는 열성을 다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만큼 열을 냈었다고 자평하는 것이니 가소롭기도 하다.

이제부터 하산 길을 걷는데 가능하면 여열을 활용하려고 노력할 생각한다. 여열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생의 정점까지 등산했을 때의 열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 뻔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열을 십이분 활용해보자고 자신에게 다짐해본다.

인생의 정점에 올라서 생각해 보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필자는 젊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빼놓지 않고 ‘광음여시(光陰如矢)’라는 명구(名句)를 꺼낸다. 광은 해(日)를, 음은 달(月)을 말하며 광음은 세월이라는 뜻이다. “세월은 화살과도 같이 빨리 흐릅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6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당신들도 눈 깜빡할 사이에 나와 같은 노인이 되는 것이니 시간을 귀하게 사용하십시요”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인생의 정점에 서서 세월의 속도를 재인식 하면서 등산길을 회고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마음에 들었던 사람, 그렇지 않았던 사람 등등 한이 없다.

슬펐던 일로는 부모님·장인 장모님·형제 자매·외우(畏友)들 등 많은 분들을 잃은 사실을 들겠는데 그 중에서도 2009년 12월 2일 집사람을 잃은 슬픔은 시간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슬펐던 일에 비하면 기뻤던 일은 그 수에 있어서 열세임을 면치 못한다. 필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생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 아무리 인생이 고생스럽다고 해도 이러한 고생을 뛰어 넘을 정도의 기쁜 일은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는 경험도 해왔다.

필자는 인생의 하산 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사는 보람을 위한 목표를 세울 것: 등산길에서도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달성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앞에서도 적은 바 있다. 이와 같은 자기 만족감이나 자기충족감이 염치없고 지나친 과대평가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앞으로 더욱 노력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격려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등산길에서 필자의 인생관을 인도한 기준은 ‘이타심(利他心)’이었다. 남을 배려하는 사려(思慮)가 특히 지식인·교양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論理)다. 하산 길에서도 이 논리는 십이분 반영토록 노력할 것이다.

▲건강: 어떤 경우에서나 건강은 필수적 과제이다. 돌이켜 보면 필자는 등산하는 동안에 큰 병을 세 번 경험했다. 첫 번째는 2005년 12월 27일 척추관협착증 수술을 받고 입원한 일, 두 번째는 2010년 5월 30일 간질성폐렴(間疾性肺炎)으로 입원 한일, 세 번째는 2010년 11월 8일 협심증 수술을 받고 입원 한 일이다.

2005년 척추관협착증은 4번-5번 요추의 협착증이었는데 근년에는 5번 요추-천골 협착증으로 보행이 불편하다. 고연령이어서 마취 회복이 어려운 관계로 수술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보행 곤란이 주는 불편은 대단히 크다.

이상 외에도 신체 이곳 저곳에 잔 병은 생기지만 원고를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 ‘우강 에세이’ 집은 계속 집필할 생각이다.

▲경제조건: 노후대비로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금’이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는 하지만 하산 길을 아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유언장을 작성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어떤 분은 매년 새해가 될 때마다 유언장을 작성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별로 유언장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유언장으로 해결해야 할 만한 재산도 없거니와 유언장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인생 하산 길에서도 절대적인 것은 ‘마음가짐’이다. 인생을 총결산하는 단계에 가까워지는 만큼 ‘마음가짐’은 더욱 중요해진다. 모든 어려움을 수용하면서 남은 인생을 즐겁게 지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권이혁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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