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장

우리 사회가 소위 ‘정보화시대’로 불리곤 해도 지식의 시대로 불린 적은 한번도 없다.

정보가 곧장 지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정보를 찾아서 흡수하고 이해하고 통합하고 현실에 맞도록 잘 적용시킬 때 정보가 지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의료윤리도 마찬가지다. 윤리에 관한 많은 정보가 현실에 맞는 지식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윤리가 그런 상태다. 갓 쓰고 양복 입은 모습이다.

한국에서 의료윤리는 문화적 차이와 언어적 차이에 의한 이해의 부족으로 잘못 인식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서양 철학사상을 도입해 세련되게 치장해 보려고 해도 문화적 차이와 인식의 차이로 인한 어색함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 의료현실에서 외국의 의료윤리 기준을 적용할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다. 한 마디로 한국사회가 생각하고 있는 의사상(像)이 너무 높고 이상적이어서 현실과 계속 갈등을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의사들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의사상이나 윤리수준이 너무 과장될 정도로 높고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요구받아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원인을 두고 이화의대 권복규 교수의 주장이 이채롭다. 그는 의료윤리연구회 강연에서 현대의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에서 사상이나 개념은 이조시대의 고고한 이상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의사상을 잘 표현한 글이 있다.

“병이 나서 고쳐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이것저것 이해관계와 길흉을 따지지 말 것이며,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험한 산길, 밤낮, 추위나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몸의 피로함을 따지지 말고 오직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일념으로 환자를 구해야 하며, 자기가 환자를 위해 수고한다는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의사가 자기의 좋은 기술을 뽐내거나 돈벌이에 정신을 쓰지 않고 오직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생각을 한다면 은연중에 스스로 많은 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의방유취 중에서’ 이러한 한국 전래 사상을 의료윤리의 개념에 가감 없이 적용시키고 판단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 전래의 사상을 기초로 한다면 의사는 돈도 벌어서는 안되고 목숨을 아껴서도 안된다. 자신의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환자를 돌봐야만 진정한 의사로 정의되고 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외국 어느 윤리 규정에도 이렇게 가혹한 규정을 제시하는 곳이 없다.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들이 갖춰야 할 윤리 수준을 우리나라 전래 사상에 맞춰 판단하게 되면 이 기준에 따라 갈 의사는 장기려 박사나 고 이태석 신부 등 극히 일부일 것이다.

그런 분들의 정신은 존경 받을 만 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의사들이 그들처럼 이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의사들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쏟아지는 많은 정보를 뒤따라가기에 너무나 힘든 상황이다. 복잡해질수록 우리가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해 줄 기준이 필요하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지만 사회과학적 지식과 윤리는 항상 새롭게 정리되는 탈바꿈을 요구받고 있다.

우리가 공부하고 가지고 있는 정보가 살아 숨쉬는 지식이 되어 환자와 의사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정서와 사고, 환경에 맞게 정리해 줄 의료윤리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의료윤리가 빛을 발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잘못 정립된 의사에 대한 개념을 바로 잡아가야 할 것이다.

올바로 정립된 윤리교육을 통해 동료의사들을 깨우치고, 학생들에게도 올바른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도 제대로 정립된 의사상을 당당하게 홍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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