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희
경기도 양평군청 공보의

지난 7월경의 일이다. “선생님, 벌에 쏘인 사람들 ‘상병 명’을 뭐라고 넣으시나요?” 보건소에서 같이 일하는 간호사가 묻는다.
“네? 당연히 ‘W579’(상세불명 장소에서 무독성 곤충 및 기타 무독성 절지동물에 물림 또는 쏘임)를 쓰죠?”
간호사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선생님 그게 보험청구 때문에 그러는데, 상병코드를 좀 바꿨으면 하는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게 보험 청구를 ‘W579’라고 넣으면 심평원에서 삭감이 돼서 다른 코드 ‘L309’(상세불명의 피부염)로 바꿔서 처방해 주셨으면….” 간호사가 말끝을 흐린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벌에 쏘여서 와서 그에 대한 처치를 하고 약을 처방했는데, 그것이 왜 벌에 쏘인 것이라고 쓰면 ‘삭감’이고, 상세불명의 피부염이면 ‘급여’란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이후 벌에 쏘인 사람들은 모두 상세불명의 피부염을 가진 환자가 돼버렸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웃기는 일이란 말인가? 삭감이란 게 무엇인가? 우리가 내는 처치에 대한 치료비용은 크게 2가지로 구분돼 의료제공자(의료인)에게 지급된다.

하나는 직접 의료인에게 지불하는 의료비, 다른 하나는 보험자(건보공단)가 미리 받은 의료보험료를 의료인에게 지불하는 비용, 이 두 가지를 합친 것이 의료수가다. 삭감은 이 두 가지 중 의료보험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심평원의 설립 목적은 의료적정성을 파악하여 보건의료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그 곳에서 주로 하는 일은 의사들의 진료와 요양급여비를 심사평가 해 환수 또는 삭감을 하는 일이다. 목적만 놓고 본다면 심평원은 국익 및 국민보건에 틀림없이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의 황당함은 바로 위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다.

폐암 전문의 이진수 박사는 일전에 “한국에 와서 ‘눈 뜬 봉사 의사’가 된 것 같다. 보험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모든 환자에게 보건복지부에서 허용하는 약과 치료법만 써야한다. 세계 수준의 치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환자의 암 덩어리를 잘라내는 수술과 병원시설은 세계적일지 몰라도 의료제도와 치료는 수준 이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수많은 의료지식을 배워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배워 나가겠지만, 그들에게 그러한 의료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심평원은 어떻게 하면 보험료를 적게 지불할 수 있는지 만을 연구하는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치료법이나 새로운 치료약이 개발되고 또 이것이 외국에서 효능이 인정돼 1차 치료제로 쓰이더라도 그저 약값이 비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슨 구실이든 붙여서 처방 시 과잉진료라는 칼날아래 환수 삭감을 한다.
우리는 환자에게 보다 양질의 치료를 위해 항상 청구할 때 상병코드를 조작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도 안 될 경우는 결국 좀 떨어지더라도 국가에서 제공하는 기준에 따라서만 치료를 해야만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병·의원을 개설해 돈을 벌려면 ‘해리슨’을 정독하는 것이 아니고, 요양급여기준에 맞춰 청구하는 법을 공부해야 한다고….”
과연 우리는 이런 상황아래 환자를 위해 제대로 된 양질의 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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