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식

병원협회 보험위원장

건강보험공단에서는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건강보험재정 악화와 보장성 확대에 따른 추가 재정 확보를 위해 2012년부터 ‘총액계약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총액계약제는 의약분업보다도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정작 당사자인 의료공급자를 배제한 채 공단에서 일방적으로 진료비지불제도 개편을 언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의료비가 급증하는 이유는 건강에 대한 국민의 요구 증대, 의료기술의 발전, 인구의 고령화 및 보장성 확대 등 의료수요의 증가요인 외에도 의약분업으로 인한 약국 조제료 증가, 의약품 실거래가상환제로 인한 약제비 증가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태생적으로 ‘저부담-저급여-저수가’ 기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의학수준을 기대하는 국민의 요구를 모두 들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단은 보험재정 악화의 원인을 행위별수가제로 인한 과잉진료로 몰아 그 책임을 의료기관에 전가하고, 그 해결책으로 총액계약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의료가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도외시한 채 손쉽게 진료비만 통제하겠다는 발상으로 이것은 자칫 의료공급체계의 붕괴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료율은 5.33%(2010년)로 총액계약제를 시행하고 있는 유럽국가들(예: 독일 14.2%)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며, GDP 대비 국민의료비 수준도 6.3%(2007년)로 OECD 국가의 평균치 8.9%(2006년)에 크게 미달하고, 국민 1인당 의료비 지출도 1318달러로 선진국(예: 네덜란드 3094달러)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수가는 원가의 73.9%(2006년 기준)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특히 일반병동 입원료 수가는 원가의 55%(2008년)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우리가 시급히 논의해야 할 일은 진료비 총액계약제 도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적정수가-적정부담-적정급여에 관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총액계약제는 정해진 재정규모 범위 내에서 지출을 허용함으로써 공급자 스스로 의료서비스 공급을 줄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제도로 의료서비스 제공에 대한 재정적 위험부담을 보험자에서 공급자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건강보험의 재정안정화는 꾀할 수 있으나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과소진료를 하도록 유도하고, 중증환자 기피, 의료행태 왜곡, 의료의 질 저하, 의학발전 동기 상실 등의 부작용으로 국민들에게 적정진료를 제공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정해진 재정규모에 맞추도록 요구하는 총액계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의료기술과 역행하여 의료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고 결국, 정부ㆍ국민ㆍ의료공급자 모두 만족할 수 없는 의료시스템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유럽의 총액계약제 적용실태를 보면 대부분 공적보험의 재정지출은 억제되는 대신 민간보험의 지출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공적보험의 재정 부담을 민간보험에 전가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결국 총약계약제 실시는 민간보험의 확대로 이어져 건강보험의 공적사회보험 기능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또한 유럽은 대부분 공공병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병원 신증설 및 의료장비 구입 등 투자비는 국가에서 별도로 부담하고, 총액계약제에 의한 진료수입은 진료재료비와 인건비 등 병원 운영비로만 지출되지만, 민간병원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총액계약제를 시행한다면 경상운영비 외에 병원 투자비까지도 모두 총액계약에 포함시켜야 할 터인데 이게 과연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진료비를 통제하기 위해 총액계약제를 도입한다면 이것은 현 수가계약제 하에서 매년 보험자, 공급자, 가입자간에 빚어지고 있는 갈등구조를 의료공급자들 상호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료비지불제를 개선하려면 우선 우리나라의 의료비 적정성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건강보험수가 수준의 적정성 평가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건강보험 수가가 의료원가에 크게 미달한다면 이는 의료비 억제에 기여하기보다는 결국 의료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의료서비스의 양적 공급확대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의료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할 때이며, 그런 의미에서 행위별수가제는 국민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유지해야 할 제도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논의해야 할 과제는 총액계약제가 아니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위한 진료비 보상수준 현실화와 재원 확보 방안 및 건강보험 관리체계의 합리화 등이라 하겠다. 의료서비스의 질 저하를 유도하면서 그 책임을 의료공급자에게 떠넘기는 총액계약제를 우리 국민들은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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