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오인규 기자] 독일 라인강의 세련된 도시인 뒤셀도르프에서 날아온 국내 의료기기 분야 크고 작은 성과들이 11월 차가운 공기를 뜨겁게 데우고 있다. 17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되는 세계 최대 의료기기 전시회 ‘MEDICA(메디카) 2025’에 참가한 우리 기업들의 활약상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
라인강변을 수놓은 전 세계 70여 개국, 5,000여 개 기업의 혁신 경쟁 속에서 ‘K-의료기기’는 단순한 참가를 넘어 시장을 주도하는 ‘키 플레이어’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올해 MEDICA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AI의 실질적 구현’과 ‘규제 장벽의 정면 돌파’다. 과거 한국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갖춘 하드웨어로 유럽의 문을 두드렸다면, 이제는 고도화된 AI 소프트웨어와 강화된 유럽 의료기기 규정(MDR/IVDR)을 충족하는 기술적 자신감을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는 평가다.
가장 고무적인 변화는 AI 진단 분야의 약진이다. 5년 연속 참가하는 노을이 대표적이다. 노을은 이번 전시에서 차세대 AI 기반 혈액분석 솔루션 ‘miLab BCM’을 전면에 내세웠다. 임찬양 대표는 “기존 혈구형태검사에 전혈구검사 기능을 통합한 완전 자동화 솔루션으로 독일 림바크 그룹 등 주요 고객사로부터 대량 구매 수요가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를 넘어, 2026년부터 선진국 시장에서의 본격적인 매출 실현 단계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유럽 인증 기관인 DNV와의 계약을 통해 IVDR 인증 절차에 착수한 점은 규제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해소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읽힌다.
수술실의 풍경을 바꾸는 휴톰의 도전도 현지에서 주목받고 있다. 연세 글로벌 혁신의료기술 실증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참가한 휴톰은 AI 폐절제술 보조 솔루션 ‘RUS Lung’을 선보였다. 수술 전 3D 시각화를 통해 외과 수술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자처하는 이 기술은 한국 의료 AI가 진단을 넘어 치료와 수술 영역에서도 글로벌 스탠다드를 제시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오렌지바이오메드 당뇨 진단기, 휴톰 AI 폐절제술 보조 솔루션 ‘RUS Lung’
전통의 강호들은 ‘품질’과 ‘협업’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셀바스AI의 계열사 메디아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단순 수출을 넘어 글로벌 기업들과의 ODM(제조자개발생산) 및 브랜드 협업을 강조하고 있다. 30년 업력의 노하우와 미국 FDA, 유럽 CE MDR 등 까다로운 인증을 통과한 품질 경쟁력을 바탕으로 파트너사의 요구에 맞춘 ‘원스톱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굳히겠다는 전략이다.
미용 및 치료 의료기기 분야의 케이원메드글로벌 역시 복합 체외충격파 장비 ‘Bellius’ 등을 통해 한국 제조업 특유의 응용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렌지바이오메드와 같은 혁신 스타트업은 미세유체 기술 기반의 당뇨 진단기로 K-의료기기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 클러스트를 대표해 원주의료기기산업진흥원이 이끄는 강원공동관의 8개 유망 기업들 또한 ‘팀 코리아’의 저력을 보여주며 바이어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는 후문이다.
참가 기업 관계자들은 “유럽 바이어들의 시선이 수년 사이에 달라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과거에는 가격표를 먼저 확인했다면, 이제는 임상 데이터와 인증 현황을 먼저 묻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산 의료기기가 ‘저렴한 대안’이 아닌 ‘신뢰하는 파트너’로 격상됐음을 의미한다.
물론 유럽의 규제 장벽은 여전히 높고, 글로벌 공룡 기업들과의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고도화된 협업 모델을 구축하는 등 우리 기업들은 각자의 해법을 찾아 영리하게 파고들고 있다.
뒤셀도르프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식들은 걱정을 확신으로 바꾸기 충분해 보인다. 기술과 신뢰, 그리고 전략으로 무장한 K-의료기기가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뿌린 씨앗들이 내년과 내후년 대규모 수출 계약이라는 풍성한 결실로 돌아와 대한민국 의료산업의 퀀텀 점프를 이끄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