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김상일 기자]다국적제약사의 국내 연구개발 투자가 마침내 1조 원을 넘었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가 발표한 ‘2025 연구개발 및 투자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국내에 진출한 33개 글로벌 제약사가 투자한 금액은 1조 369억 원에 달한다.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 중심의 임상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고급 연구인력도 꾸준히 늘고 있다. 숫자만 보면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 성과가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1조 원이라는 투자 규모는 한국이 단순한 임상시험 대상국을 넘어, 글로벌 제약사들이 전략적 연구 거점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상징적 신호다. 이는 국내 의료 인프라의 신뢰도, 높은 임상 참여율, 정부의 바이오헬스 육성 정책이 맞물린 결과다.
하지만 이 투자 흐름이 국내 산업의 자생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공동연구와 인력 교류가 확대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글로벌 본사의 주도 아래 국내는 하청 구조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제도다. 보고서에서도 지적됐듯, 한국은 여전히 복잡한 임상 승인 절차와 미비한 디지털 임상 제도, 더딘 약가 결정 구조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규제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혁신은 제도 앞에서 멈추고 있는 것이 국내 현실이다.
이와 함께 한국은 높은 임상 참여율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신약의 국내 등재 속도는 일본보다 2~3배 느리고, OECD 평균의 1/4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신약 도입률도 문제다.
이는 결국 환자의 치료 기회를 늦추고, 다국적제약사들의 국내 시장 진입을 주저하게 만든다.
투자 확대가 환자에게 닿지 못한다면, 그 숫자는 산업적 성과가 아니라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이번 보고서는 분명 의미 있는 성과를 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제도 개선이라는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1조 원이라는 숫자에 도취되기보다,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누구에게 닿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표가 필요하다.
연구개발의 성과는 제약사 연구 실험실을 넘어 환자 병상까지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되고 그 길은 제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다국적제약, 정부 관계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