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이 ‘일본화’ 를 보고 생각한 것은?

조선 문인화는 작가의 필력에 집중한 반면,
일본화는 장식성이 강하고 사실적인 표현에 치중
김종영은 특정목적에 순응한 일본화를 ‘예술 타락’ 예로 설명

▲ ‘작가와 대중’김종영 자필원고(김종영미술관 소장)
해방 이듬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개교함으로써, 비로소 이 땅에서 우리 스스로에 의한 미술교육이 시작되었다.이것을 계기로 미술교육에 대한 논의가 많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당시 동양화과 교수로 초빙된 월전 장우성의 회고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근원 김용준과 오랜 논의 끝에 일제강점기 시절 시행되었던 조선미술 전람회의 잔재, 즉 사실적 묘사에 치중한 일본채색화에서 벗어나 ‘조선 문인화(文人畵)’를 지향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회고했던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이 땅에 몰아친 민족주의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왜색(倭色)’을 탈피하자는 사고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문인화가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필력(筆力)에 집중한 반면, 일본화(日本畵)는 장식성이 강하고, 실용적이며, 사실적인 표현에 치중하였다.김종영은 이런 ‘일본화’를 살펴보며 느꼈던 자신의 생각을 ‘작가와 대중’이라는 글에 정리·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그의 인식이 남다른 점은 당대의 지배적 사고, 그러니까 일본화를 ‘왜색’같은 문제로 배격한 것이 아니라, ‘예술 타락’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대목을 자세히 들어보자.

“ … 우리는 예술이 한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타락의 길을 걷고 있던 예를 바로 이웃나라 일본에서 보아왔다. 소위 ‘일본화’라는 기치아래서 근 백년을 두고 일본사회에서 얼마나 번창했던가. 그 예술성이란 것은 고작해야 저속한 기법의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군벌세력의 비호 아래서 그들의 국수(國粹) 관념의 상징으로 길러졌고, 그것으로 해서 많은 양심적인 예술이 수없이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그 말로가 일본군벌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것은 물론이다.

패전 후에 ‘일본화’아닌 동양화라고 해서 들고 나온 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햇빛을 보지 못하고 먼지 속에 묻혀 있던 도미오카 뎃사이였으니, 이러한 웃지 못 할 난센스는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역사상에서 우리는 더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이 지구상에는 이와 유사한 현상이 현재도 진행 중일 뿐 아니라 미래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역사에서 볼 때 어떤 개인이나 권력을 가진 집단이 예술을 특별히 애호하여 기른 예가 없지 않으나, 대개는 그러한 권력의 간섭이 오히려 예술을 망치는 결과가 더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빛나는 명작들은 외부의 부당한 횡포에 항거하는 열정에서 생겨났고, 예술가는 항상 그의 자유와 지조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

김종영은 어떤 집단의 특정한 목적에 예술가들이 순응하며 작업하는 것을 일컬어, 예술 타락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영이 일본화에 대해 이렇게 인식하게 된 것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일본화가 어떤 연유로 예술성 보다는 기법에 치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먼저 서양과 직접 교류를 시작하였다. 즉 1549년 스페인 출신 예수회 소속 프란치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 신부가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 상륙하여 기독교를 선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8세기 초에도막부(江戶幕府)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쇼군(將軍)들의 지원을 받아 ‘난학(蘭學·네덜란드 학문)으로 대표되는 서양학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바로 이때 일본에 들어온 서양서적들 속에 동판화로 제작된 정교한 삽화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18세기 들어 중국에서 수입한 한약재 대금으로 은과 동을 과도하게 지출함으로써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자 에도막부의 8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1751)는 자국 내에 자생하는 약초들을 파악하여 수입 대체 품목을 찾으려는 일환으로 일종의 식물도감 같은 책들을 발간한다.

이를 위해 서양화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중에서도 정밀 묘사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1778년 일본화 세밀화법의 교과서라고 할 사타게쇼잔(佐竹曙山, 1748-1785)의 ‘화법강령(畵法綱領)’이 발간된다.


여기서 그는 “필법을 주로 할 경우에 는 세부를 잃어버리므로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가는 붓으로 형상을 그리고 채색을 하여 먹의 흔적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으며, “여백을 없애고 실재공간을 그려야만 사실적인 그림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전통 동양화법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발달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쇼군에 의해 장려된 화풍이 이후 ‘일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된 것이다.

‘작가와 대중’에서 김종영이 일본화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통해 그가 ‘일본화’의 이런 특징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예술이 어떤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실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자신에게 솔직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간섭과 외부의 억압에 저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모두 해방의 기쁨 속에 감성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왜색’일본화를 배척하고 있을 때, 김종영은 남들과 달리 예술의 본질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 선상에서 일본화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 박갑성의 말을 되새겨보게 된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각백(김종영)은 균형과 조화와 이성적인 것에 대해 선천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각백은 르네상스적인 인간이기보다는 그리스적인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실에 있는 민족이나 국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영원하다는 뜻에서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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