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전신 광혜원 개원 ‘근대의학 태동’

광혜원→제중원→세브란스 132년 역사로 이어져
국가 연구중심병원으로 글로벌·의료산업화 선도

▲ 제중원 설립자 알렌 박사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 근대의학이 처음 태동되고 발전되어 온 132년 역사의 최고의 의료기관이다.

1885년 4월 10일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첫 서양식 병원이자 왕립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 문을 열었다. 광혜원은 ‘제중원’(濟衆院)으로 곧 개칭하면서 신분의 구별 없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조선민중에 대한 진료와 수술을 시행해 조선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중원을 만들고 초대 원장을 지낸 이는 미국 공사관 소속의 의료선교사인 알렌(H.N. Allen)박사였다. 알렌박사는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 대감을 살려 고종황제의 큰 신임을 얻었다.

알렌 박사는 서양 근대의학을 통한 진료와 조선의료인 양성계획을 담은 ‘병원설립안’을 고종황제에게 올렸으며, 자신은 무보수로 일할 것을 약속했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위한 제중원은 개원 첫해에만 1만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또한 제중원의학당을 설치해 조선 청년들의 의학교육을 실시하며 한국 근대의학의 발상지가 되었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게 됨에 따라 조선정부는 제중원의 운영비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4대 원장인 에비슨 박사(O.R. Avison)가 재임 중인 1894년 9월 미국 선교부로 운영권을 넘겼다. 이후 에비슨 원장은 해외선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제중원의 확장을 이루게 된다.

특히 미국 출신의 대부호이자 자선가인 세브란스(L.H.Severance)로 부터 새병원 건립기금을 기부 받아 1904년 9월 23일 서울역 앞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개원한다.

지상 2층 지하층 구조에 외래진료실과 남녀 입원실, 수술실 등이 갖추어진 이 병원은 기부자의 뜻을 기리고자 세브란스병원으로 불리게 된다.

▲ 1885년 세워진 제중원 모습

한국의학의 태동·발전·시련 함께


전임 알렌박사 때부터 조선청년에 대한 의학교육이 제중원에서 지속되었으나 부족한 교육여건으로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에비슨 원장은 조선의 환자는 조선인 의사가 치료하고 교육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우수한 해외선교 의사와 의학자들을 초빙하여 의학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그 대표적인 이가 ‘맥라렌’ ‘러들러’와 ‘허스트’ ‘스코필드’ 등이었다.

또한 한글의학교과서 편찬 작업과 함께 대학 연구부를 설치하여 체계적인 의학연구가 이루어지게 했다.

그 결과 1908년 6월 3일 세브란스의 학교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면허의사인 7명의 졸업생이 첫 배출되었다.

▲ 1930년경 세브란스병원 수술실 모습

아울러 1914년에는 “인턴제도”를 세브란스병원에 첫 도입하여 의학교 졸업생들이 충분한 임상실습과 함께 질환별 전문의로서 성장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에비슨 원장은 근대 치의학과 간호학 교육에도 노력했다.

1915년 11월 미국 치과선교사인 쉐플리(W.J.Sheifley)를 초빙하여 세브란스의전과 병원에 치과학교실과 치과를 설치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치의학이 뿌리내리게 했다.

이후 치의학전문학교 설립이 일제 총독부의 거부로 이루지 못하자, 1931년 개원한 동양최대의 세브란스 치과병원을 통한 치과수련교육을 실시하여 그 수련생들이 우리나라 치의학분야를 이끌게 했다. 또한 1910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세브란스간호부 양성소를 통한 전문 간호인력도 양성하여 한국간호학을 이끌 지도자를 배출하게 된다.

일제 강점이 심화됨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진에 대한 신사참배와 학교와 병원 개명을 강요하게 된다. 이에 해외선교사 출신인 많은 교수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강제 추방 또는 투옥되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 세브란스병원 전경

그리고 병원과 학교명도 강제로 ‘아사히’(旭)의학전문학교 및 부속병원으로 바뀌는 치욕을 겪는다. 그러나 에비슨 원장이 키워낸 한국인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교수진과 의료진은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단 한명의 일본인 졸업생도 배출하지 않은 유일한 한국의학 교육기관이자 의료기관으로 해방을 맞게 된다.

세브란스,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동란으로 대부분의 병원과 학교시설이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다행히 주한미군과 해외선교단체 지원으로 복구를 이룬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과대는 1957년 1월 5일 연희대학교와 합동을 이루게 된다.

1916년 언더우드 선교사를 대신하여 연희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을 같이 겸했던 에비슨 원장 때부터 두 학교의 통합움직임이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미루어졌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으로 새로이 출범한 세브란스병원은 1962년 6월 서울역 앞에서 신촌동으로 병원과 학교를 옮겨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후 병원과 의대에 속해있던 간호학과 치의학 분야가 연세대 간호대학과 치과대학 및 치과대학병원 등으로 속속 독립, 확장하면서 세브란스병원은 동양최대의 메디컬센터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자병원으로서 1983년 서울 강남에 강남세브란스병원과 경기 용인에 용인세브란스병원을 차례로 개원하여 지역의료전달체계에 크게 기여하는 성장세를 이루게 된다. 또한 1969년 우리나라 첫 암전문 진료기관인 연세암병원 설립을 시작으로 재활병원, 심장병원, 안이비인후과병원 등 질환별 전문센터 설립을 이루어 국내 병원계의 전문센터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한국의료의 세계화를 위해 2007년 국제병원인증평가인 JCI를 국내 병원 중 첫 획득하여 해외환자 유치에 큰 전환점도 만든 점도 세브란스병원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일련의 세브란스병원의 국제화 노력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해외환자를 진료하는 의료기관으로서 자리 매김하는 한편, 올해(2016년) 8월말 중국 내 한국 종합병원으로 최초로 칭다오세브란스병원의 기공식을 갖는 해외진출로 가시화되었다.

2016년 1월 현재 2200여 병상에 51개 진료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임 교수진 900여명에 전공의 960여 등 총 1900여명의 의사직이 근무를 하고 있는 한국 대표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은 향후 국가 연구중심병원으로서 의료산업화를 선도하고자 연구 및 교육 분야에 투자를 확대해 나아갈 예정이다.
/ 이상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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