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제생의원,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병원

‘일제강점’ 암울한 시기에는 부립병원…이후 부산의대 부속병원으로 사용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과연 어디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1885년 서울 재동에서 문을 연 광혜원(廣惠院)을 꼽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도 광혜원을 1885년 4월 알렌이 세운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 또는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 1880년, 지금의 광복동에 세워진 제생의원

그러나 부산 향토사학계의 의견은 다르다. 지난 40여년 동안 부산의 역사와 민속ㆍ민문학을 연구해온 향토 사학자 주경업(朱慶業)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은 광혜원이 맞지만,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제생의원’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그는 관련 자료들과 함께 제생의원의 역사적 사실과 설립 배경, 우리나라 의료계에 끼친 영향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 1407년부터 부산에 왜관을 두기 시작한 일본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을 계기로 왜관 관수((館首) 공관에 체류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관립 제생의원’ 을 설치한다. 당시 위치는 본정 2정목, 지금의 중구 동광동 부산호텔 인근 주차장 터다. 그때 부산에 살던 일본인들은 왜관 공관에서 진료를 받았으나 제반 여건이 미흡해 제대로 된 진료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수신사로 왔던 해군 군의관 야노(矢野義澈)가 일본 정부에 새 병원 설치를 건의해 ‘관립 제생의원’ 을 탄생시켰다. 제생의원은 1877년 2월 야노가 초대원장으로 취임해 개원식을 갖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한다. 그 해 치료를 받은 환자는 일본인이 2998명, 조선인도 729명이나 됐다. 이처럼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4~7월까지 역병(疫病)과 이질이 만연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에 대한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서양의학이 높은 완치율로 명성을 얻어 환자가 늘어나자 제생의원은 좁은 시설에서 효율적인 진료를 할 수가 없어 3년 뒤인 1880년 2월 변청정 2정목(지금의 광복동 로얄호텔 자리)에 새로 병원을 짓는다. 이때 병원 규모에 대해 일본 육군 군의관이던 고이케(小池)는 “용두산 동남쪽 기슭에 지어진 병원은 진료과, 약제과, 계산과, 통역과를 두고, 진찰실, 조약실(調藥室), 숙직실, 소사실(小使室), 욕실, 화장실이 있는 본 건물 이외 3평 넓이의 입원실이 4개 딸린 병동과 시체실 1개가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시설 확장과 부립병원 탄생= 그러나 일본군 군의관에 의해 운영되던 제생의원은 1881년 재(在)부산 일본거류민 자치제가 시행됨에 따라 1885년부터 운영권이 거류민단에 넘어가고, 병원 명칭도 ‘부산일본공립병원’으로 바뀐다. 민영화된 병원은 조직을 확대해 원장 1명에다 의사 2명, 약제사 2명, 약제사 보조원 1명, 서무 2명, 소사 2명이 근무했다.

특히 원장은 반드시 일본 제국대학을 졸업한 의학사 또는 거기에 준하는 자격자로 제한할 만큼 엄격한 체계를 유지했다.

문호가 개방되고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증축ㆍ확장을 거듭하던 병원은 1893년 9월 ‘공립병원’ 으로 개칭됐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부산 일본거류민단이 공법인(公法人)이 되면서 1906년 12월부터는 ‘부산거류민단립병원’ 으로 불리게 된다. 그 사이 병원 규모도 늘어나 1909년 10월경에는 기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약국, 경리부 등에 소아과와 이비인후과가 새로 설치되고, X-Ray 촬영기 등 최신 의료기기를 갖춰 당시 국내에서는 유수한 병원으로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부산거류민단립병원’ 은 1914년 또 다시 그 이름을 ‘부산부립병원’ 으로 바꾼다. 조선총독부가 ‘부산부제’(釜山府制)를 공포하고, 부산부(府)가 생기면서 ‘부산 일본인거류민단’ 은 폐지되고, 병원 명칭도 자연히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부립병원은 점차 진료 수준을 향상시켜 나갔다. 당시 일본총독부는 대한제국이 국민들의 진료를 위해 설립한 전국 13개 ‘자혜의원’ 을 관장하며 공공의료망을 확충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 맞춰 부립병원은 1917년 간호사와 산파(産婆) 양성소를 부설 운영하고, X-Ray 장치를 개선하는가 하면 전염병 환자들을 위한 격리병동까지 개축한다.

■아미동시대와 해방 그리고 지석영

▲ 부산부립병원, 1936년 현재 부산대병원이 있는 자리로 옮겼다.
= 1876년 동광동에서 시작해 몇 차례 간판이 바뀌며 광복동에서 5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옛 제생의원은 1934년부터 2년간의 공사를 거쳐 1936년 곡정 1정목(현 아미동 부산대병원 자리)로 이전한다. 신축 병원은 부지 2만 3727㎡(7190평), 건평 4818㎡(1460평)의 2층 벽돌 건물로 평상시 보통 환자 100명, 전염병 환자 7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병원은 1937년 6월 1일 진료업무를 시작해 해방을 맞았고, 1947년 부산시립병원,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육군병원으로 쓰이다가 1956년 11월 1일 대통령령에 따라 부산의대 부속병원으로 대용됐다.

제생의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지석영(1855~1935)이 천연두 치료법을 전수받은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천연두에 관심이 많았던 지석영은 1879년 10월 제생의원으로 내려와 70여일 동안 원장인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관이었던 도즈카(戶塚積齊 )로부터 종두법을 배운다. 이를 익힌 지석영은 병원에서 두묘(痘苗-소의 두창에서 뽑은 면역물질)와 종두침을 얻어 서울로 가는 길에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처남과 마을 아이들에게 우두를 접종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종두법 실시의 시초다.

*후기:1876년 부산 개항과 함께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생의원’ 의 140년 역사는 1947년 ‘부산시립병원’ 으로 불렸던 과거를 계승해 지금은 ‘부산의료원’ 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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