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김종영이 추상조각의 선구자인가?

‘우성 김종영’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연재된 글을 통해 독자들은 김종영이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극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 이경성은 그를 “양괴(量塊)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 라 하였고, 박갑성은 그가 “임산부처럼 몸을 조심하며, 정신을 가다듬으며, 한평생을 임산부처럼 살았다” 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김종영 자신도 “예술은 종교” 라 하였으며, 종국에는 “신과의 대화” 라 하였다. 그의 삶은 ‘절제’ 로 일관되었다. 아마도 김종영의 모친이 조그마한 동자승이 집 뒤 산에서 ‘엄마!’ 하고 부르며 내려오는 태몽을 꾸었다는 일화가 그의 이러한 삶을 예견한 것이었나 보다.


그런 그에게 1980년 5·18 광주항쟁 직후인 7월, 그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3년 온 국민의 성금으로 그가 혼신을 다해 탑골공원에 제작 건립한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이 1979년 작가와 논의도 없이 무단 철거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그는 병을 얻어 1982년 12월 15일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편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은 후학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무단 철거 후 12년 만인 1991년 서대문 독립공원에 복원되었다. 국가에서 주도해 건립한 조형물 중 여러 이유로 철거된 후 복원된 기념조형물은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이 유일하다.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김종영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진척되어 있을까? 사실 그 연배 작가 중 그만큼 유품이 잘 보존된 작가도 드물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 결과물은 빈약하다. 학위논문은 석사학위 논문이 열한 편이고, 학술 논문은 지금까지 총 열다섯 편 정도 발표되었다. 그리고 김종영에 관한 단행본은 세 권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박사학위 논문은 없다.


이는 작가 김종영에 대해 한국미술계가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그를 어떤 위치에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필자는 김종영이 1980년 전시도록에 게재한 「자서(自書)」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한 부분에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개성이나 창의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단순하여 한 작가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종합적인 역량이나 예술성을 면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김종영 서화·미술 모두 섭렵


이번 연재를 하는 동안 필자는 기존의 김종영에 관한 글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작가 김종영이 지니고 있는 종합적인 역량을 통찰한 글이 아직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지금까지의 김종영에 대한 연구는 파편화되어 있다. 그는 서화와 미술 모두를 섭렵했고, 그것들을 일생동안 병행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미술계에서 서화와 미술은 완전히 분리, 교체되어 상호교류하지 못하고 있다. 총체적 연구가 결여된 상태에서 김종영의 추상조각만을 바라보면 일차원적인 작품연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왜 김종영이 추상조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그만의 당위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서예, 드로잉, 조각을 총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에 대한 총체적 연구를 위해서는 과거 조선시대의 선비가 갖춰야 했던 교양에 대한 지식이 필수불가결하다. 이 점이 지금의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이 김종영을 연구하며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서양미술 중심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런 ‘교양’ 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그의 호 ‘우성(又誠)’, 낙관에 쓴 ‘불각도인(不刻道人)’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봐야 된다. ‘성(誠)’ 은 유가(儒家)의 선비가 갖춰야할 실천덕목이며, ‘不刻道人’ 과‘不刻의 美’ 는 유가와 대척점에 있는 도가(道家)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김종영에 대한 연구는 유가와 도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그의 예술관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誠’을 이해한다면 김종영이 동경 유학시절 친구 박갑성에게 ‘예술도 종교’ 라고 한 이유, 예술가를 농부와 비교한 것, 그리고 정년퇴임하면서 후학들에게 당부한 ‘천재형의 예술가’ 보다는 ‘노력형의 예술가’ 가 되기를 당부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역설적인 ‘不刻의 美’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도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무위(無爲)’ 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무위’ 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다. 이런 도가의 ‘무위’ 와 유가의 대표적인 공부방법론인 ‘격물치지(格物致知)’ 를 알고 있다면, 그가 왜 조각의 본질에 대해 궁구했는지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말을 헤아려 이치를 깨닫는 것이 ‘격물치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시적, 통시적인 ‘통찰(洞察)’ 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것을 통찰한 결과를 정리한 많은 글들을 남긴 것이다.


그런 그가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였다. 서예에서 추구하는 방법론은 ‘법고창신’ 이다. 즉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 이다. 그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안진경의 글씨를 ‘임서(臨書)’ 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끊임없이 ‘법고’ 하여 ‘창신’ 하는 자세로 서예에 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신’ 의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선대 명필의 영향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에는 자신이 일가를 이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모습을 추사 김정희와 세잔느에서 확인했다.


법고창신 후 유희삼매 추구


추사를 사표로 삼은 김종영이 ‘법고창신’ 하여 궁극으로 지향하는 바는 ‘유희삼매(遊戱三昧)’ 의 경지에 도달하여 느낄 수 있는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작가에게 작업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고, 손을 쉬는 시간은 온갖 잡생각을 해야 하고 생활을 고민해야 하는 괴로운 시간”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김종영의 서예작품에는 바로 그 『유희삼매』 외에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 몇 점 더 있다.

득진삼매, 연도미상, 131x33cm
예컨대 ‘참된 삼매를 얻는다’ 는 의미의 『得眞三昧(득진삼매)』, 아마도 차를 마시며 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는 『紫壺三昧之室(자호삼매지실)』 이 그것이다. 더불어 그는 「遊戱三昧」 라는 제목의 짧은 글도 썼는데, 예술은 어떤 공리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글이었다. 그의 예술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글이라고 여겨지기에, 앞서 살펴 본 글이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읽어 보도록 하자.


유희삼매, 연도미상, 131x33cm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고 보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헛된 노력’ 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 그리스 조각에 유희성이 없는 것은, 그리스 조각가는 공리가 없는 데는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김종영은 수업시간에 “청안(淸眼)과 혈안(血眼)이 있다. 작가는 청안이어야 한다. 혈안은 무엇에 대한 욕구로 충혈이 되어 무엇을 성취하려 한다. 이권이나 탐욕을 의미하고…. 작품을 혈안으로 제작한다? 아니다. 청안, 어린이처럼 해맑은 눈으로 제작에 임하라.” 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김종영 사후 한 세대가 지났다. 우리는 지금 물질에 혈안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작가로서 그의 삶의 지향점은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그에게 길을 묻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않겠는가?


“작품을 누구를 위해서 제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진실한 예술가라면 서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진실로 남을 위하려면 먼저 자신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라면 이 말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마음속 깊이 새겨 둘 말이지 않은가. 그런 김종영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동양과 서양을 혈연관통하여 진정한 ‘입어유법 출어무법 아용아법(入於有法 出於無法 我用我法)’ 한 것이었다.
[글·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지난 1년간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 에 대해 연재해 준 김종영미술관 박춘호 학예실장님께 감사드린다. 24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일생동안 절제된 선비의 삶을 살아온 우성 김종영 선생의 철학과 서예와 조각 작품을 통해 그가 추구한 ‘불각의 미’ 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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