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이 바라본 한국 미술 지향점은?

‘과작의 작가’ 김종영 ③

김종영은 같은 세대의 작가 중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집에서 조그마하고 도톰한 노트를 머리맡에 두고 무언가를 늘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32년 간 재직하면서 학교 신문인 『대학신문』 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글을 남겼다. 제자들은 그 글들을 모으고 선별하여 1983년 타계 1주기 추모 사업으로 유고집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를 간행하였다. 이후 2005년에는 원고를 추가하여 증보판을 출간하였다.


유고집에 수록된 몇몇 글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글들이 날짜 기입이 되어 있지 않아 언제 쓰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대학신문』 에 기고했던 글들만큼은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으므로 아쉽지만 그것들을 통해 그의 ‘생각의 흐름’ 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대학신문』 에는 1953년 『국전편감(國展片感)』 부터 1967년에 쓴 『현대미술과 인체 미』 까지 열네 편의 기고문과 1980년 정년퇴임까지 다섯 편의 인터뷰 그러니까 총 열아홉 개의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이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김종영이 자신의 제자·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넓게는 대중에 공개될 글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매우 공들여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그가 굴곡진 20세기 우리 역사 속에서 ‘한국미술의 지향점’ ‘미술의 본질’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세’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작가는 인격 완성을 위해 정진해야


그는 국전 추천작가로서 한국 최초의 추상조각 작품인 『새』 를 출품했던 1953년 제2회 국전에 대한 관람 평을 다음과 같이 썼다.


“특히 새롭기를 원하는 신진작가들에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예술이란 기계제품이 아니라는 이 새삼스런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남의 형식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가 나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리를 망각하고 남의 인격의 투영에만 쫒아 다니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며 도무지 작품을 무엇 때문에 제작하는지를 모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남의 생활과 교섭을 갖는 것은 작가에게도 없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러한 대타적 관계가 오직, 자기완성에 그 목적이 있을 진데 왜 자기의 속임 없는 생리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가. 예술가의 작품이란 정신의 행동에서 보여주는 생활에(의) 소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우리는 그의 작품에 나타난 어떤 이해의 심도라든가 또는 해결의 방법이나 양을 통해서 작가의 역량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의 제작 태도가 좀 더 진지하여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 지혜롭기를 바란다.”


고전은 현실에서 새로 해석 때 가치


그 다음해인 1954년에 개최된 제3회 국전을 평한 『작가의 조형의식 빈곤』 에서는 ‘미술품이 갖는 문화적 의의’ ,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관’ 그리고 ‘전통이라는 것’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작업중인 김종영
“하나의 미술품이 갖는 문화적 의의를 따지게 될 때는 개인의 제작품이란 것을 떠나서 대내적으로는 그 나라 문화의 특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을 생활하는 태도라든가 정신적인 기능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어서 국가사회의 지혜의 척도가 되고 마는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며 인류의 행복이 어디 있는가를 알리는 표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방금 개최 중에 있는 국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 정신의 실태를 설명하고 생활감정을 웅변해 주는 작품을 요구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무엇보담도 이러한 고도의 작용을 가진 작품을 요구하고 싶다.

… 전통을 살린다는 것이 기껏해야 형식의 피상적인 답습에 불과하다면 전통은 거기서 끊어지고 만 것이며 고전의 가치란 것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새로이 해석되어 가는 데서만 언제나 그 빛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전통을 살린다든지 향토성을 높인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 용이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현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향토성 문제가 세계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데서만 문화의 가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두에 불란서를 중심해 발단(發端)한 소위 신흥 미술의 영향으로 미술의 정치적 국경이 없어진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그 후 다시 2차 대전을 겪은 미술사조는 더욱 단일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호불호 간에 전 세계는 동질의 과제를 공유하기까지 이르렀다.

… 아무튼 현대의 예술가들은 각자 국경을 초월한 공통의 현재를 살고 있다는 신념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주장하고 제가끔 다 다른 발상을 하면서도 서로 통할 수 있는 세계적인 현실을 가지게 된 것은 좋은 일이나 이러한 현대적 사조를 잘못 인식하는 데서 또한 그것을 악용하는 데서 예술의 절조(節操)를 우습게 알고 문화를 모독하는 비행이 있지 않기를 원한다.”


동서양 미술이 제대로 융합되려면…


1958년 5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미국 미네소타대학은 건국 후 최초의 국제 교류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를 보고 김종영은 『대학신문』 에 『이념상으로 본 동양미술과 서양미술』 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비롯된 동서미술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소개한 후 동서미술의 융합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우리는 성급히 동서미술의 융합이란 것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원래 동양미술의 결함은 서양적 지성이 부족한 데 있다고 보겠는데 이것은 서양미술이 동양적 직관성이 없는 이상으로 큰 결점이 되어 있어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채우는 데 있어서도 서양사람만큼 적극성을 띠지 못하고 기성형식을 아직도 반복하고 있으니 반복이란 것에서 형성의 모방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매너리즘이 지양되지 않는 한 동양미술의 전진이란 것은 바랄 수 없을 것이며 과거에 빛나던 문화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회복되지 못하는 불행을 초래할 것이니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의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한편 서양미술의 결함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이십세기의 지성이 끝내 지성에 의해서 조종되는 한 영영 동양사상의 핵심은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해 있는 현대인간 자체의 생명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도 좀 더 진지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며 이러한 한동안의 수련기가 경과한 후에 비로소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은 인류문화사에서 찬연한 빛을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마흔을 전후해서 그가 쓴 글들이다. 국전에 참여한 신진작가들에게 피력한 그의 견해는 이 신문의 독자인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과 진배없었을 것이다. 그의 관점을 요약하면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동서의 차이점을 잘 살펴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완하며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우리 문화의 특수성이 세계적으로 인류의 보편성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세계적인 문화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단순히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형식적인 답습만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교류전에 앞서 1957년 국립박물관에서 『미국현대회화조각 8인전』 이 열렸다. 이경성은 이 전시를 보고 “8인전을 계기로 우리가 얻어야 할 점은 … 미국미술을 연구하여 무슨 방법으로 그들이 미술사적 전 코스를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달리어 현대에 도달하였는가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미술의 연구는 미술사적 현대에로 이행하려는 오늘의 한국화단에 많은 시사와 계시를 주는 것” 이라 하였다. 미국 추상미술을 실지로 접한 그는 ‘방법’ 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김종영과 매우 다르다. 특히 그의 주장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 이듬해 일련의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앵포르멜’ 이라 불린 추상표현주의 열풍이 한국서양화단에 몰아쳤다.


김종영은 작품뿐만이 아니라 많은 글을 통해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한국미술계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세상이 온통 서둘러 가려는 것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와 관점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글·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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