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왜 공공기념조각을 제작했을까?

김종영의 기념조각 ①

성경을 신화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조각의 특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유태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하였다. 그러던 중 하느님은 모세에게 시나이 산으로 와서 자신과 유태인 사이의 계약을 새긴 돌판을 받아가라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시나이 산에 40일 간 올라가 있을 때, 산 아래에 있던 유태인들은 불안해하며 하느님을 등지고 송아지를 자신들을 이끌 새로운 신으로 정했다. 그러고는 금을 추렴하여 녹인 후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이에 하느님은 크게 진노하였으며, 모세는 하느님께 받은 돌로 된 증언판을 내던져 부수었다. 이후 진노를 가라앉힌 하느님은 다시 모세에게 새로운 증언판을 받으러 시나이 산으로 올라오라 하였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십계명’ 으로 알려진 새로운 계약이 적힌 돌판을 주었다. 이 열 가지 계명 중 눈에 띄는 것이 “너희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어서는 안 된다” 는 계약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는 것인데, 하느님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으나 조각품을 만드는 것은 엄격히 금하였다.


조각은 공간에 존재하는 실체다


그림이 평면에 그려진 환영(illusion)이라면, 조각은 공간에 존재하는 실체다. 초상조각의 실재감은 그림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실체로 존재하는 조각의 특성을 하느님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우상을 만드는 것을 절대로 금한 것이 아니었을까?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이래 많은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업적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조각 작품을 세웠다. 그 예로 고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황제 (Darius the Great, B.C.550-486)는 비시툰 산(Mt. Bisitun)에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과정을 18×7m 크기에 새긴 글과 함께 3×5.5m 크기의 부조로 조각해 놨다. 이 비문과 부조는 요즘으로 말하면 고속도로변에 설치된 대형광고판과 같은 것이었다. 한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356-323)은 금화에 자신의 초상을 부조로 장식하여 그 금화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통치 하에 있음을 각인시켰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조각이 공간에 존재하는 실체이며, 복제가 가능한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념조각이 지금도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1957년 건립한 『포항전몰학생충혼탑』의 부조를 제작 중인 김종영
김종영, 기념조각 단 두 점 제작


이런 기념조각을 김종영은 일생에 세 점을 제작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두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1957년 6월 15일 포항에서 제막된 『포항전몰학생충혼탑』 과 다른 하나는 1963년 8월 15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이다. 마지막 하나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창회에서 의뢰하여 1961년 10월 16일 세운 음대 초대학장을 지낸 『현제명』 흉상이다. 그래서 김종영이 제작한 공공기념조각은 단 두 점이라 할 수 있다.


김종영은 자신의 글 「작가와 대중」 에서 일본화를 예로 들면서, 예술가들이 어떤 집단의 특정 목적에 순응하며 작업하는 행위를 일컬어 예술 타락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가 단 두 점일지라도 공공기념조각을 제작하였다고 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특히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며 유희삼매에 도달하여 탈속한 경지에서 작가로서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였던 그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더불어 그가 1952년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공모전에 응모하였던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1963년 제막한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을 제작 중인 김종영
휴전 후 4·19와 5·16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30년 간은 전몰자를 기리기 위한 충혼탑과 전적기념비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가진 다양한 기념 동상들을 국가적 사업으로 건립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가히 기념조각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가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각가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는 윤범모가 1980년 『계간미술』 봄 호에 게재한 「기념조각, 그 문제성의 안팎」 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1930년대부터 1979년까지 약 50년 간 조각가에 의해 제작된 기념조각품은 320여점에 달하는데, 그 중 20점 이상 제작한 작가가 여덟 명으로 그들이 만든 작품이 236점이었다.


이런 시기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서, 국전심사위원에 문화재보존위원이었고 특히 ‘애국선열조상(彫像)건립위원회’ 의 전문위원이었던 김종영이 단 두 점을 제작하였다는 것 역시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는 다른 건립위원들(건립위원은 모두 조각가였음)이 동상을 직접 수주 제작하였음에도 그는 일절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공기념조각 관련 인식차 뚜렷


김종영이 1952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를 위한 국제공모전에 응모할 당시 함께 응모했었던 윤효중(1917-1967)과 김경승(1915-1992)은 1950년대부터 관 주도로 진행된 다수의 공공기념조각을 제작하였다. 특히 윤효중은 1956년 팔순을 맞는 이승만대통령을 위해 남산에 81척尺 (전체 길이 약 24.54m로 동상은 23척 약 7m) 높이의 동상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김경승은 앞서 살펴본 윤범모의 조사에 의하면 40개의 공공기념조각을 제작하여 수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잠시 당시 공공기념조각과 관련된 일화를 살펴보자. 1956년은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잊지 못할 해이다. 미술인협회 이사장 선거문제로 미술협회가 둘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대한미협과 한국미협, 다시 말해 서울대, 홍익대로 갈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장발과 홍익대의 윤효중 간에 설전이 있었는데, 1956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에 게재된 기사 「미술계 내분의 단면」 에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씨는 윤씨더러 「동상건립 맡도 맡아(‘많이도 맡아’ 의 오기인 것 같음) 먹은 청부업자 같다」 고 말하고 윤씨는 「작품 하나 내지 않은 사이비미술가」 라고 이에 응수하는 등 인신 공격전까지도 있었다는 소문.” 이 기사를 통해 당시 미술인들 사이에서 공공기념조각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평생에 두 점만 제작한 이유는?


김종영미술관 최종태 관장의 기억에 의하면 김종영은 남산에 세워진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가리켜 ‘동상(凍像)’ 이라 불렀다 한다. 한자 얼 동(凍)을 사용하여 동상이라 부른 이유는 언젠가 세상이 변하면 마치 해빙기에 얼음이 녹아 사라지듯 헐려 없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산의 이승만동상은 5년을 못 버텼다. 그럴 가능성은 설립되던 당시부터 있었다. 1956년 8월 25일 『경향신문』 에 실린 「독재경향을 우려-김의원, UP기자와 단독회견서」 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28세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던 김영삼은 UP와의 인터뷰에서 두 개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탑골공원과 남산)과 송덕비 한 개를 건립하기 위한 예산이 미국 달러로 약 40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는데, 그 금액이면 이만 명 이상의 굶주린 한국인에게 한 달 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이기에 동상 건립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김종영은 1957년 『포항전몰학생충혼탑』, 1963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을 제작하였다. 특히 김종영이 가장 경계하였던 예술이 타락하는 것, 즉 발주자의 의견을 가장 많이 존중해야 하는 것이 공공기념조각일진데, 김종영은 제안을 수용했고 제작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두 공공기념조각을 제작할 때 어떤 마음자세로 임했고, 왜 평생 두 점만 제작하고 말았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김종영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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