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한국조각 세계 넘겠다’ 일생 전념

1953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입상 ③

김종영이 런던에서 일본을 거쳐 부산 송도 임시교사로 배달된 당시 전시 도록을 일생 동안 봉투째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이 공모전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두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공모전이 작가 김종영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박갑성의 회상과 평론가로서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고 이경성의 1975년 김종영 회갑기념전 도록 서문『양괴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에서의 기술을 살펴보자.

박갑성은 “각백의 평생에 있어서 이송도 시절은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무명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 라는 명제를 내걸고 영국 런던에서 공모하는 콩쿠르에 응모해서 입상한 작품을 제작한 곳이 이곳이었고, 한편 사실적인 작품에서 추상적인 조각에로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한 작가에 있어서 자기의 능력에 자신감이 생기고 새로운 제작 방향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귀중한 일이다. 각백의 경우 갑자기 이런 경지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니다.”

런던 콩쿨 계기 ‘추상’ 으로 전환

박갑성의 말은 이 공모전이 작가 김종영의 작품세계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기에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는 지적인 것이다. 한편 그의 회상을 좀 더 찬찬히 음미해 보면 김종영의 작업이 추상으로 가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며, 이 공모전 입상을 통해 더욱 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김종영이 한국현대조각사에 첫 추상작품으로 한 획을 그은 작품『새』를 1953년 국전에 출품하였던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1953년 5월 4일자 대학신문-무명정치수 기념비 작품 사진
한편 이경성은 서문에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조각가 김종영의 학창시절과 1953년까지의 작품에 대해서는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얘기하기가 어렵다. 작품으로서 가장 처음으로 이야기꺼리가 되는 것이 1953년 3월 10일부터 4월 13일까지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라는 주제를 갖고 있는 국제조각대회에 입상한 작품이다. 이것은 석고조각으로 서 소재를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주어진 주제인 무명정치수에 대한 애정을 토로한 작품이다. 요약된 수법과 양괴의 역학이 보는 사람의 시각에 큰 감동을 주었다.”

이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그런데 1953년 이전 제작한 작품으로는 사후 고향집 다락에서 발견된 두상 두 점이 있다. 그 외에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두 점이 있는데 하나는 1940년 동경미술학교 졸업 작품인 여인 누드입상과 1949년 제1회 국전에 출품한 여인좌상이 있다. 총 네 점의 인체작품에서는 아직 “요약된 수법과 양괴의 역학” 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공모전에 출품한 여인입상은 가장 김종영다운 인체작품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공모전이 작가 김종영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면, 당시 그가 이 전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53년 5월 4일자 서울대학교 학보인 『대학신문』에 실린 김종영의 소감을 들어보자.

“그리 대단한 것도 못되니 별로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요행이겠지요.조각예술에 정열을 바쳐 온 한 사람의 학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세계수준을 돌파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의욕만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 하는 사람에게야 조국이 있는 이상 조국이 이런 처지에 있을수록 분투할 각오와 태세를 더욱 굳게 할 뿐입니다.”

짧은 소감이지만 그는 ‘조국’ 과 ‘조국의 처지’ 를 거론하며, 이 공모전을 계기로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조각예술 발전을 위한 자신의 각오와 다짐을 명료하게 표명하고 있다.

▲ 1953년 5월 4일자 대학신문-무명정치수 기념비 기사
현재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는 도록 봉투에는 도록과 두 개의 신문기사가 함께 보관되어 있다. 유족에 의하면 김종영은 생전에 국내외 잡지와 신문에서 사진과 기사를 꾸준히 스크랩하였다고 한다. 김종영이 생전에 보던 책과 잡지들이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책들의 서지목록을 작성하며 확인한 것은 실제로 스크랩한 사진과 기사들이 책 사이사이에 끼어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진과 기사들은 분명 김종영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그러니 그가 도록 봉투 속에 어떤 신문기사를 보관하였는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 도록 봉투에 있던 신문기사는 모두 고희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는 김종영이 태어나던 해인 1915년 3월 11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조선에서 나온 최초의 서양화가 그림’ 이라며 소개된 고희동의 유화작품『자매』사진과 다른 하나는 1959년 1월 5일자『동아일보』에 고희동이 게재한『화필생활 50년에 잊혀지지 않는 일 세 가지』이다. 시간상으로 봐서 이 기사들은 공모전 이후에 스크랩해서 이 봉투에 같이 보관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한국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기사였을까?

한편 최종태 관장은 1975년 회갑전 도록의 서문을 이경성이 쓰기로 하여 그가 삼선교 자택에서 김종영과 인터뷰할 때 자신도 함께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 도록을 김종영이 이경성에게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봤다고 회상하였다.

‘예술은 종교’ 작업·집필 전념

대학신문에 실린 김종영의 소감과 봉투에 같이 보관한 두 개의 신문 스크랩 그리고 일본 유학시절 자신이 본 일본 미술에 관한 그의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예술은 종교” 라고 박갑성에게 말했던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그가 대한민국의 조각가로서 어떤 시대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김종영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한국의 조각예술이 세계수준을 돌파하기 위해 예술을 종교로 생각하며 일생을 수도자 같은 자세로 작업과 사색 그리고 집필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과 생각을 주위에서 더불어 논할 동료미술인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무지와 교활이 범람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진리를 논하고 엄한 원칙을 따지는 것은 피하고 있다. 주위에 이러한 말을 주고받을 교우도 거의 없어졌거니와 때와 곳을 얻지 못한 고담준론이 일에 방해가 되고, 신변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지성과 명상을 벗 삼아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으리라. 대체로 예술가를 훈련시키는 것은 제작과 반성으로 족하다. 겸양과 용기와 사람의 미덕을 길러주는 것은 오직 제작의 길 뿐이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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