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

예술가는 혼자 걸어가는 길, 혼자 추구하고 공부하는 것
제자 작업 손봐 주지 않아 몸소 예술가의 모습 실천

교육자로서 김종영은 어떠했을까? ③

김종영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 몇 마디 말을 해도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 하였다.

때론 그 단순한 표현이 듣는 학생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아 알 듯 모를 듯한 말이 되곤 했다. 또한 후학들이 회상하는 김종영의 또 다른 모습은 제자들의 작업을 일절 손 봐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림을 조금이라도 배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학생의 그림을 고쳐 주며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는 것을 배우는데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는 지잘 알 것이다. 이는 미술 실기수업이 말 그대로 ‘실제의 기능이나 기술’ 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마디의 말보다는 시범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실기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종영은 일체 그러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제자들이 스승 김종영에 대해 교육자로 그리고 작가로서 존경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이 체결되었다. 최의순의 기억에 의하면 1953년 전쟁 중 부산에서 입학하여 한 학기를 다니고 휴전 후 2학기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돌아와 보니 전쟁으로 종로5가에서 당시 미술대학이 있던 지금의 대학로까지 거의 모든 건물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종영의 부인 이효영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6·25가 발발하던 해 봄 김종영은 친구의 빚 보증 문제로 자신의 돈암동 집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었던 터라 그는 환도 후 미술대학 뒤에 있는 대학공동관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그 공동관사에서 1960년대 초까지 생활하다 삼선교에 집을 장만하여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공동관사에서의 삶 중 말수가 적은 김종영의 인품에서 비롯된 기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박갑성의 기억이다.

“ … 하루는 관사에 동거하는 모대학 교수가 공동으로 사용해 오던 창고를 독점할 생각으로 아무 말도 없이 자물통을 채웠더라는 것. 보통 같으면 교수 집안끼리 큰 싸움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각백은 아무 말 없이 시장에 가서 좀 더 큰 자물통을 사오라고 해서 나란히 채워두었더니 잠시 후에 아무 말 없이 풀더라. …” 이를 통해 공동관사에서의 생활이 편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러한 대응을 통해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 제2회 국전 출품작,『새』, 9x7x55.5cm, 나무, 1952(김종영미술관 소장)
해방 후 1949년 제1회 국전이 열렸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1953년 12월에 개최되었다.제1회 때 김종영은 추천작가로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제2회 때는 추천작가이면서 심사위원까지 역임하였다. 바로 이 제2회 국전에 김종영은 한국조각사에 추상조각의 효시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새”를 출품하였다.

무엇보다도 1953년은 작가 김종영으로 인해 20세기 한국미술사에 역사적인 해로 기록되었다. 이유인 즉 1953년 5월 피난지 부산에서 김종영이 한국인 최초로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조각공모전에 서 입상하는 쾌거가 있었기때문이다. 이를 통해 김종영은 피난지 부산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품에 매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9년 대학공동관사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김종영은 국립공보관 전시실에서 월전 장우성과 2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스승의 작업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국립현대 미술관 관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조소과 명예교수인 최만린(1935~ )이 비교적 상세히 구술하였다.

“ … 그분은 그때 화실이 따로 없으셨어요. 그래서 우리 교실, 큰 창고 같은 교실 한쪽 귀퉁이에서 작품을 하시더라고, 그런데 늘 보면 책을 옆에다 놓고 이렇게 보면서 자기 실험적 작업을 하시고, 그러면 옆에 가서 보면서 이렇게 체감적으로 느끼면서 선생님이 추구하는 게, 뭐 그때 뭐 아르프 (Jean Arp, 1887~1966) 책도 꺼내놓으시고, 마리 로랑상 (Marie Laurencin, 1883-1956) 것도 이렇게 펴놓으시고, 아주 정직하게 공부를 하시는 걸 많이 봤어요. 이제 그렇게 했지, 무슨 아주 요즘같이 뭐 세상이 이렇고, 뭐 이즘이 어떻고, 유파가 이렇고, 뭐 경향이 이렇고 그러는 교수법 이라는 건 내가 학생시절에는 없었으니까. …”

김종영은 자신이 외국작가들의 작품집을 보고 연구하며 작업하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수업 중에는 외국 작가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최의순, 최종태, 최만린의 공통된 기억이다.

최종태 관장은 당시 김종영선생이 수업시간에 외국작가들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서양, 아니, 마이욜 조각 같은 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 이거여, 그렇게. … 모델을 연구해서 작품을 만들어라 이거여. 베끼는 건 안 된다! 그런 뜻이지. … 그때 김종영선생이 거기에 선을 그은 거 같아.” 라고 회상한다.

▲ 1959년 2인전 전시장에서 월전 장우성(오른쪽)과 함께 월전 우측에 “꿈”, 47X9X67cm, 브론즈 1958
그런데 심차순(1957년 입학, 1961년 졸업)은 스승 김종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 시절 젊은 우리들을 동경하게 했던 추상조각의 원리에 대한 선생님의 가르침도 참으로 고맙고 유익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작품을 통해서도 추상조각의 원초적인 형상을 보여 주셨는데 1953년 작인 “새” (나무), 1958년 의 “꿈” (브론즈), “작품58-5” (철) 조각이 기억되고, 서구 작가들 중 헨리 무어, 브랑쿠시, 자코메티, 마이욜 등 작품의 매력도 일깨워 주셨다. …”

1954년에 입학하여 1958년에 졸업한 최만린의 회상으로부터, 1957년 입학하여 1961년에 졸업한 심차순의 회상까지의 시차를 고려해 보면 김종영은 동시대 서양조각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자신이 터득하기까지는 추상조각의 원리를 학생들에게 섣불리 가르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술가는 혼자 걸어가는 길일세. 예술가는 혼자 추구하는 거고, 혼자 공부하는 거다. 딴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하는 거니까 그리 알라” 1953년 신입생 최의순에게 했던 말이다. 사실 김종영은 제자들에게 이런 예술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선생님이었다. 어려웠던 시기에 선생님의 작업하는 생생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커다란 가르침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것이리라. 이보다 더 완벽한 실기수업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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