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나는 응급실 간호사다

당장 처치가 필요한 진짜 중환을 가려내

진료를 진행하는 트리에이지(Triage·중증도 분류)는 응급실 진료의 핵심이다

환자 모니터에서 나오는 규칙적인 QRS소리, 일정한 피치의 산소포화도 알람, 셋팅 해놓은 시간마다 울리는 혈압 재지는 소리, 인퓨전 펌프에서 시간에 맞춰 정해진 용량이 다 들어갔다고 알리는 소리- 평온하다. 조금 과장하면 썩 괜찮은 협주곡 같다고 할까? 응급실이 잘 돌아가는 느낌이다.

나는 청각이 예민한 편이다. 원래도 주변 소리의 근원을 잘 파악하는 편이었는데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9년이라는 시간이 나를 ‘귀로 보게’ 만들었다. 불규칙해진 QRS 소리, V-tach 알람, 점점 떨어지는 산소포화도 피치, 이상 혈압을 알리는 경고음, 갑자기 빨라진 인공호흡기의 흡기소리, 작동 오류를 알리는 기계음들 - 공습경보 발효! 어디야? 누구지?

응급실 내원자 모두가 응급처치가 필요한 환자는 아니다. 응급 현황판 안에는 외래진료 접수 대기시간을 못기다리고 응급실을 찾은 바쁘신 분, 만취로 응급실에 실려 오신 정신 못차리시는 분, 질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놀라신 분, 그리고 인간이 질병을 이겨나가는 속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약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낫기를 바라는 성급한 분들도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응급실의 경제적 부담이 적고 문턱이 낮아 접근성이 용이한 우리나라 응급실의 현재 모습이다.

이러한 내원자 모두가 본인이 가장 급한 환자라고 말하는데 그 아우성 속에서 당장 처치가 필요한 진짜 중환을 가려내 진료를 진행하는 Triage(중증도 분류)는 응급실 진료의 시작이자핵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Triage를 통해 위중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 환자의 급성기 처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하여 1명의 중환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응급실 존재의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최근 계속 체한 듯 명치부분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본인은 바쁜 사람이라 소화제 처방받으러 응급실에 왔다는 59세 남자 환자. 초진 진료에서부터 뭐 이렇게 묻는게 많냐며 소화제나 처방해보라고 말하는 환자에게 ‘저희도 증상을 알아야 어떤 약 줄지 결정하지 않겠냐’고 조금만 협조부탁 드린다고 말하고 진료를 진행했다. 당뇨·고혈압·고지혈증 병력, 최근 움직일 때 마다 증상이 부쩍 심해진다는 증상기술은 둘째 치고 응급실 의료진을 긴장시켰던 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슴을 부여잡고 소화제나 달라고 재촉하는 절대 A타입의 환자 캐릭터! 1분도 안 걸리는 간단한 검사가 있으니 마지막으로 그것만 보고 약 처방하자고 회유하고 부탁하여 찍은 심전도에서는 ST분절이 응급실 천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 때부터 심장내과에 알리고 환자한테 상황 설명하고 보호자에게 연락하고 환복, 혈관확보, 기본검사, 전 처치 약물투여, 물품 과 제모상태 점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하여 내원 22분 만에 CAG실에 내려갔다. 옮겨 내려가는 침상의 머리맡에 붙어서 끊임없이 환자 심전도의 임상적 의미를 설명하던 내과 의사와 이 의료진들이 나에게 거대한 의료사기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며 경계하던 환자의 의심의 눈초리. 그 광경은 차라리 한편의 꽁트 같았다. 그렇게 그렇게 휘몰아치듯 내려 보냈던 CAG 결과는 mid-LAD occlusion. Stent를 세 개나 삽입하고 응급실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도 언제 퇴원하냐고 묻는 환자의 조급증은 응급처치를 못한 상태였다.

이렇듯 응급실에서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중증 환자의 초기처치가 되겠고 아픈 사람보다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쓰게 된다. 하지만 정작 아파서 응급실에 온 99명의 환자들은 언제나 본인이 가장 초 응급이기 때문에 ‘왜 빨리 안 아프게 안 해주냐’는 원성을 듣는 일도 빈번하다. 신규시절에는 ‘환자분은 말이라도 할 수 있지, 저기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 중환 있으니까 기다려 달라’고 생각하면서, 보채는 마음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여 갈수록 대부분의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들은 <아프지 않으려 내원했지, 죽지 않으려고 내원하진 않으니까> 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중환 속에서도 ‘나 먼저 봐 달라’는 환자들을 조금은 너그러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신규간호사 전체교육에 참여하게 되면 나는 <친절을 본인의 무기로 장착하기>를 강조한다. 익숙하지 않은 업무와 잦은 실수 속에서 신규간호사 본인을 지켜줄 것은 친절을 통해 형성된 환자, 보호자와의 라포(Rapport). 위기의 순간에 나를 구원해주는 동아줄이 되어줄 것이라고 얘기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문율이 되겠지만, 응급실에서는 환자에게 성의껏 마음을 썼다가 상처로 돌려받는 일도 허다하다. 응급실 체류시간 동안 급성기 처치 열심히 하고 컨디션 안정적으로 만들어놓으니, 왜 싼 병실 안주냐고, 잠깐 처치했는데 무슨 병원비가 이렇게 많이 나오냐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 나왔는데 검사는 왜 했냐고 소리 지르는 경우들도 적지 않게 있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면 지치게 되고 근무에 회의가 드는 순간들이 생긴다. 친절 말고도 나름대로의 방어법이 필요하다. 마음의 갑옷을 단단하게 여며 입되 정보공유의 통로를 개방하고 끊임없이 환자와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여전히 스스로도 완성하지 못한 고급 기술이지만...

그래서 아직도 출근길이 신난다. 9년이나 드나들고 있는 응급실 문이 열리는 순간이 설렌다. 아직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지식과 기술과 정보가 있고 아직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자들이 화수분처럼 존재하므로.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뒤돌아 보는, 나는 신나는 응급실 간호사다.

▲ 병원 응급실은 늘 분주하다. 이러한 아우성 속에서 Triage를 통해 위중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 환자의 급성기 처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하여 1명의 중환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응급실 존재의 첫 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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