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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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는 일은 어떠한가
코끝이나 발끝이 아니라
온몸 젖는 일은

빗속에 녹아 있는
지난 봄 뚝 져버린 그 붉은 꽃잎
여름 공중의 시퍼런 서슬

살갗으로 배어들어
낙엽으로 허우적대다
툭 떨어질지언정

더더 깊이 파고들어
내리다 지친 눈발로
질척거릴지언정

코끝이나 발끝이 아니라
온몸 젖는 일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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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담: 서울의대, 대학원. 의학박사. 의사평론가.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

문학예술(1996).

하늘로 올라간 세상 구름이 비로 내려 올 땐 가지고 올라갔던 모든 걸 되내려 놓는다. 계절, 색깔, 날카로운 기세까지 빗물로 바꾸어 세상을 적신다. 비, 빗물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가 있지만 과거를 현재로 가져다준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시제의 구분은 원래 있을 수 없는 허망함임을 잘 알면서도 그렇다.
세상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코끝에도 발끝에도 찾아볼 수가 없지 않은가. 기왕 되돌아온 지난 서슬이라면 베임이나 찔림의 동통(疼痛)이 심할지라도 온통 겪고 싶다. 거기서 현재도 미래도 돋아나 무성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그 서슬도 동통도 찰나로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진료실안 흰 가운 속에 온몸을 담는 일과 똑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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