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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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어느 호텔 창문으로
나팔꽃 여인이 찾아왔다
얇은 보라색 두건을 쓰고
불쑥 찾아 와 창문을 덮는다
왠일이냐고 묻자
긴 줄기들이 올라와 내 몸을 휘감는다
세찬 바람이 그 여자의 얇은 속옷을
자꾸 들추며 보여주는 하체의 생채기는
그 여자를 거쳐 간 폭염과 모랫바람의
장난이란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입에서는 사막 냄새가 풍기고
목소리에는 모래가 섞여 서걱거리는
고향냄새 물씬 풍기는 그 여인
입술은 바짝 말라 있다
나는 어서 저 사막을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주기 전에는
갈 수 없다고 몸을 비튼다
낙타의 등을 열어
달빛과 별빛을 탄 물 한 바가지 부어주자
가늘고 성긴 덩굴들 좋아라
꽃나팔 불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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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경북의대. 박영호 외과의원.
시와시학 등단(1992년).

하늘만 바라보면서 이른다면 세월 가는 건 해와 달이 적당히 섞이는 것이다. 섞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자주 올지 뜸하게 올지는 각각 다르지만 이런저런 대소사(大小事)가 불쑥 들어선다. 크고 작은 그 일들이 나의 안팎을 칭칭 감아 숨을 누르기도 하고, 도리 없이 벌거벗고 외로움에 떨어야 하기도 하며 그런 것이 참된 삶이라고 더러는 체념한다. 또렷한 생채기 하나쯤 가슴에 남겨 영영 잊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서서히 그러나 점점 메말라가며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 모두 갈증에 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음성마저 변해간다. 마음 속 조금 남은 습기조차 아까워 꺼칠한 소리로 덮어 막으려 한다.
어느 날, 찾아 온 저 심장 속 고향 색깔과 기억 속 시냇가 물기. 특히 이른 아침 나팔꽃. 나팔꽃은 덩굴식물로 동양화에선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는 것을 형상화 한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는 배다. 낙타는 사막에서 몇 달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견딜 수 있다. 기다란 속눈썹은 태양의 직사광선을 가릴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여닫을 수 있는 코는 콧속으로 모래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 준다. 우리네 신산한 삶은 사막이다. 그 사막을 건너가는 배의 출발을 그나마 남은 소망으로 불어주는 나팔이 핀다. 잠깐이라도 이 아침 이슬로 가장 목마르지 않은 채로 해와 달이 멈추기를 나팔꽃이 소리 내어 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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