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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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어느 호텔 창문으로
나팔꽃 여인이 찾아왔다
얇은 보라색 두건을 쓰고
불쑥 찾아 와 창문을 덮는다
왠일이냐고 묻자
긴 줄기들이 올라와 내 몸을 휘감는다
세찬 바람이 그 여자의 얇은 속옷을
자꾸 들추며 보여주는 하체의 생채기는
그 여자를 거쳐 간 폭염과 모랫바람의
장난이란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입에서는 사막 냄새가 풍기고
목소리에는 모래가 섞여 서걱거리는
고향냄새 물씬 풍기는 그 여인
입술은 바짝 말라 있다
나는 어서 저 사막을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주기 전에는
갈 수 없다고 몸을 비튼다
낙타의 등을 열어
달빛과 별빛을 탄 물 한 바가지 부어주자
가늘고 성긴 덩굴들 좋아라
꽃나팔 불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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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경북의대. 박영호 외과의원.
시와시학 등단(1992년).
하늘만 바라보면서 이른다면 세월 가는 건 해와 달이 적당히 섞이는 것이다. 섞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자주 올지 뜸하게 올지는 각각 다르지만 이런저런 대소사(大小事)가 불쑥 들어선다. 크고 작은 그 일들이 나의 안팎을 칭칭 감아 숨을 누르기도 하고, 도리 없이 벌거벗고 외로움에 떨어야 하기도 하며 그런 것이 참된 삶이라고 더러는 체념한다. 또렷한 생채기 하나쯤 가슴에 남겨 영영 잊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