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연명치료중단 의한 죽음’ 의미 日 조어

현재 사용 중인 漢字의 태반이 ‘made in Japan’

▲ 김일훈
김일훈
대법원 판결에 의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김 할머니 사례 이후 ‘존엄사’에 대한 법제화 논의가 활발하다는 뉴스다. 그런데 법제에 앞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 의한 사망’을 ‘존엄사’라 표현하는데 대해 반대하는 학계전문가들이 있어 용어의 사회적 합의를 유도하는데 고난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주목을 끈다.

이러한 사태를 예기한 듯,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존엄사’라는 표현을 삼가고, ‘연명치료 보류 또는 중단’등으로 표현했다니 사려 깊은 처사라 하겠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상용하고 있는 안락사와 존엄사의 어원을 찾아보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락사라는 용어는 ‘Euthanasia’의 일본말 번역이고, 존엄사는 ‘Death from cessation of prolonging the dying process’(연명치료중단에 의한 죽음)를 뜻하는 일본말 조어(造語)이다.

번역어 조어 창안의 귀재 일본

원래 한문언어에 의지해왔던 일본은 명치유신을 맞이하여 서양문화를 최단시일에 흡수하는 근대화과정에서 선진문물의 학술용어를 도입하는데 가장 적절한 한자(漢字)번역어와 한자조어(造語)를 창안하는 귀재(鬼才)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한자 사용국인 한국과 중국학계에서 인정하는 바이다.

우리 한국 개화기에 선각자 유길준 선생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한 언문일치의 ‘한성일보’를 선보였으며, 서재필 박사는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간했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우리 한국인이 사용하는 현대용어 및 학술어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번역용어 그대로라 한다.

“언어는 ‘문명의 창(窓)”이다. 지금부터 100여년 전 개화기를 맞이한 우리 한자 사용국(중국, 일본, 한국)은 근대 유럽의 이질문명에 직면하게 되어 낯선 서양문물을 번역하고 도입하는 크나큰 노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 명치일본의 선각자라 할 많은 학자와 번역가들은 한자어에서 낱말들을 골라내어 이를 환골탈태(換骨奪胎)함으로서 합당한 ‘번역용어’에 충당했던 것이며, 동일용어에 대해 번역이 다른 용어들은 점차 자연도태적으로 한 가지 번역용어로 수렴되고 정착되었다고 한다.

한편 한자의 종주국 중국에서도 여러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번역용어를 선보였으나 마땅치 않아, 결국 대량의 일본제 번역한어(漢語)를 역수입해서 정착시켰으며, 현재 중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한자(漢字)현대어의 태반이 ‘made in Japan’이라니 놀라운 일이다.

여기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우선 필자가 아는 중국식-한국한자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의 ‘민국’이다. 그런데 중국서도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식번역어를 선호하여 요즘은 Republic을 ‘민국’ 대신 ‘공화국’이라 번역한다고 들었다.

중국은 청조(淸朝, 1616~1912년) 말기에 영국에 유학한 사회학자 엄복(嚴復)에 의해서 삼권분립사상, 논리학, 진화론, 자유론 등의 많은 번역서가 발간됐으며, 그가 번역한 중국식 번역어가 가장 많지만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는 경제학을 생계학(生界學), 사회학을 군학(羣學)으로 번역했었다.

새 시대를 알리는 근대용어로서 일본식한어(漢語)를 적극 활용하여 중국사회에 유입한 두 인물이 있으니, 강유위(康有為)와 양계초(梁啓超)이다.

이 두 사람은 청조말기의 대표적인 개혁파정치가이자 언론인 사상가로서 일본 명치유신의 계몽사상을 도입하여 중국근대화에 기여하려는 개혁인사로서 한때 일본망명생활을 통해서 일본의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은 근대 일본문물에 접하면서 일본학자들이 번역한 용어의 우수성에 매혹되어 저작과 언론활동에서, 엄복 등이 이룬 중국번역어 대신 거의 전적으로 일본식번역용어를 사용한 결과 중국 학계와 언론계에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청조가 망하고 1922년 손문(孫文)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그들 삼민주의(三民主義)헌법은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의 삼권으로 시작되는데, 이 3가지 용어도 전적으로 일본번역어를 전용한 것이다.

과거 중국서 주은래 수상의 제창으로 진행된 정책 ‘과학기술 현대화(科學技術 現代化)’라는 용어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일본식 한자이다.

안락사와 존엄사 어원

서론이 너무 길어졌지만, 안락사와 존엄사에 되돌아가서 어원(語源)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 명치시대에 이미 ‘안락사’라는 번역용어를 썼으며, 명치 39년(1906년)에 경도제국대학 의학부의 이찌무라(市村)교수가 쓴 “의사의 권리의무(醫師之權利義務)”라는 책에서 희랍에서 전래한 ‘Euthanasia’의 내력을 소개하고서 “안락사는 결코 의사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고 적혀있는데, 이 책이 ‘안락사’용어를 나타낸 최초의 문헌일 것이라 한다.(오사카의 강건영 박사). 그리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안락사’용어는 Euthanasia의 일본번역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존엄사(尊嚴死)’에 해당하는 간단명료한 어휘는 미국이나 유럽에는 없으며, 알고 보면 존엄사는 영어번역이 아니라 “소극적 안락사”의 일본말조어(造語)이다. 존엄사란 어휘가 영어 ‘Death with Dignity’의 우리말 번역이라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말썽 많은 미국오리건州의 “자살방조 법”의 이름이 Death with Dignity Act(존엄사법)인데, 이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함께 담고 있는 법안명칭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Death with Dignity라 할 때는 오리건州의 안락사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리의 ‘존엄사’를 Passive, Conservative, Indirect Euthanasia(소극적, 보수적, 또는 간접적인 안락사)라고 표현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Death from refusal of prolonging the dying process(연명치료 거부에 의한 죽음) 또는 Death from withdrawal of life-support system(생명유지시스템의 철거에 의한 죽음)이라고 길게 호칭한다.

그리고 ‘카렌’ 사건이후 1976년 캘리포니아에서 Living Will(생전유언)에 의해서 ‘연명의료 거부’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한 법의 명칭이 Natural Death Act(자연사법)이니, 이것이 미국서 최초의 소위 ‘존엄사법’이다. 그러한지라 존엄사의 짧은 영어표현은 ‘Natural Death(자연사)’라고 하겠다.

그런데 일본이 소극적 안락사를 ‘존엄사’라고 공식화한 시기는 아마도 ‘일본 존엄사학회’가 탄생한 1983년과 때를 같이 할 것이라 추정된다.

일본에서 1976년에 ‘일본 안락사협회’가 조직되어 안락사의 법제화를 추진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막상 그들이 실질적으로 추진하는 내용이 ‘소극적 안락사’였기 때문에 7년 후 협회명칭을 ‘일본 존엄사협회’라고 개칭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쓰는 존엄사는 일본말 조어(造語)이고, 영어 번역이 아님을 알리는 바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한국에서 사용하는 학술용어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용어를 전용하고 있는 터에, 현재 널리 보급되어 있는 ‘존엄사’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필자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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