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제조자•연도 정확히 밝혀진 술…칵테일에 애용


비록 옛날만큼 그 명성을 떨치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007 시리즈’는 참으로 매력적인 영화다. 사실 한 주제로 그토록 오래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화는 앞으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유명한 주제가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신과 이를 뒤받쳐주는 환상적인 무기들은 유사한 영화 장르에서 항상 선도 적 역할을 해 오고 있다(사진 1).
그러나 007 특유의 액션에 못지않게 영화팬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제임스 본드의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다. 아닌게 아니라 007 영화에서는 수많은 음주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단연 제임스본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유명한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Dry Martini, shaken , not stirred)”라는 주문일 것이다.
물론 007 영화에서는 보드카를 사용하는 보드카 마티니도 나오고 있지만 원래 마티니는 진(Gin)에 베르무트를 섞은 후 올리브로 장식한 무색투명한 칵테일이다. 여기서 마티니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는 진은 칵테일 베이스의 술로서는 가장 잘 알려진 술이다. 사실 진은 단독으로 음용되기보다는 칵테일의 한 부분으로 훨씬 더 사랑을 받고 있는 술이다. 비단 마티니뿐만이 아니라 진토닉, 핑크레이디 등 많은 유명 칵테일에서 애용되고 있는 진은 가히 ‘칵테일의 총아’로 불릴 만도 하다.
진이란 술이 만들어진 유래에는 약간의 다른 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17세기에 홀란드에서 처음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독일에서 출생한 네덜란드 사람인 실비우스(Franciscus Sylvius; 1614~1672)란 의사가 관련되어 있다. 저명한 의사이면서 한편으로는 화학 등의 기초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던 실비우스는 라이덴대학의 의대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신장질환 환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이뇨제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착안한 것은 이뇨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알코올과 쥬니퍼 열매를 혼합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침내 1650년 실비우스는 오늘날 진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하였는데 당시에는 이를 프랑스어로 쥬니퍼를 의미하는 ‘genievre’라고 하였다. 지금도 네델란드에서는 진을 ‘jenever’라고 부르고 있다. 이 때문에 진은 수많은 술 종류에서 유일하게 그 제조연도와 제조자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 술로 평가받기도 한다.
결국 진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기호품으로서의 술이 아니라 의약품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개발 당시의 홀란드에서 진은 주류판매점이 아니라 화학상점에서 판매되었다.
그런데 사실 실비우스의 공은 쥬니퍼 열매 자체를 이용한 것 보다는 곡물 알코올에 이를 혼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쥬니퍼 열매는 이미 그 당시에도 이뇨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곡물 알코올은 포도나 다른 과일로 만들어지는 브랜디와는 달리 너무 거칠어서 음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실비우스가 만든 진은 맛도 좋았고 더욱이 포도 알코올에 비해 저렴하게 생산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알코올 음료로서 점점 인기를 끌게 되었다.

‘진’ 옥수수•호밀 등 원료 연속 증류법 사용 제조
쥬니퍼 열매 섞어 재증류 … 숙성은 시키지 않아

진은 옥수수, 호밀, 보리, 밀과 같은 곡물을 이용하여 만든다(전형적인 경우 옥수수 75%, 보리 15%, 기타 곡물을 10% 정도 사용한다). 발효 과정은 위스키 등 다른 술에서와 동일하고 증류는 연속 증류법을 사용하여 시행한다. 그 다음 진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쥬니퍼 열매의 맛과 향을 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증류된 알코올에 쥬니퍼 열매를 섞어 이를 재증류시키는 방법과 증류액의 증기를 쥬니퍼 열매에 통과시켜 그 성분을 흡수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진에는 주성분인 쥬니퍼 열매 이외에도 코리안더(Coriander), 레몬, 오렌지 껍질, 회향풀(fennel), 카시아, 아니스, 아몬드, 안젤리카 등을 넣는다. 정확한 첨가 성분은 회사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제품에 따라 그 성분에서는 약간씩 다르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은 보통 40도에서 47도 사이의 알코올 농도를 가지게 되고, 숙성은 시키지 않는다.
진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먼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런던 드라이진 타입이 있다(사진 2). 이 형태의 진은 1831년 연속 증류법이 소개되면서 보다 순수한 알코올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이전의 전통적인 단식 증류방법으로는 매우 거친 알코올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단맛을 첨가하여야 했지만 연속 증류법의 소개 이후부터는 드라이 한 형태의 진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런던 드라이진에서 런던이란 용어는 한때 대부분의 진이 런던 지역에서 만들어진데서 유래되었다. 진은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으로 홀란드 사람이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으로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는데, 술 이름이 간단하게 진으로 바뀐 것도 영국에서였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런던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지역적인 의미는 없다. 즉 다른 지역의 진에서도 런던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실제 현재 런던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진은 Beefeater 진 한 종류 밖에 없다). 그리고 드라이 또는 엑스트라 드라이라는 표현도 거의 모든 진들이 이 타입에 속하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실제 현재 시판되고 있는 거의 모든 진들이 드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두 번째 종류인 다치진(Dutch Gin)은 그렇게 잘 알려지지는 않고 있는데 지금 보편화되고 있는 형태인 런던드라이진과는 다르다. 즉 다치진은 위스키와 비슷하게 몰트로부터 증류한다. 그리고 런던 드라이진 보다는 일반적으로 도수가 낮고 1~3년 동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다. 판매 역시 국한된 지역에서만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접하기가 어렵다.
자! 여러분, 진을 젓지 않고 흔든 마티니로 만들어서 맛있게 한잔 하시고, 그 최초의 목적인 이뇨작용을 한번 경험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사진 1>‘007 다이어몬드는 영원히’의 포스터 속의 숀 코네리.

<사진 2>런던 드라이 진 타입의 각종 진 제품의 미니어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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