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어떻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은사·아버지 무한신뢰로 조각가 길 걸어 중학교 2학년인 김종영이 서예로 동아일보 주최‘전조선학생작품전시회’에서 일등을 하였으며, 워낙 그 실력이 출중하여 심사위원들이 믿기지 않아 결과발표 후 그를 불러 그들 앞에서 다시 써보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그렇다면 서예를 통해 예술 세계에 입문하게 된 그가 어떻게 서양미술 중에서도 특히 조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조모상, 20x22x42㎝, 석고에 채색, 1936.유족들은 그가 어려서부터 미술
조각가 김종영이 서예에 정진한 이유 ‘법고창신(法古創新)’하여 마침내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앞서 김종영이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수준 높은 문사(文士)교육을 받았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제식민지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은 서예에 대해 어떤 사회적 유용성도 없는 단순한 오락 내지는 취미활동으로 생각하여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조각가 김종영이 일생동안 서예에 정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함을 더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그가 서예에 정진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
전국 서예대회서 1등 한 중학생 김종영 우성 선생의 붓글씨는 본령인 조각보다도 더 김종영다운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 김종영의 제자이며, 김종영미술관 관장인 최종태는 김종영의 서예에 대해 “우성 선생의 붓글씨는 본령인 조각보다도 더 김종영다운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하였다. 예부터 ‘서여기인(書如其人)’ 이라 하여 ‘글은 곧 그 사람’ 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에게 서예가 더 김종영다운 일이라 함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진다.▲ 당나라 777년경 안진경이 쓴 ‘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우성 김종영(1915∼1982) 선생이 추구한 아름다움은‘불각(不刻)의 미’로 압축된다. 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억지로 군더더기를 붙이려 하지 않았다. 김종영 선생은 추상을 넘나들며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 한 300여점의 조각작품과 3000점의 드로잉 그리고 1000여점의 서예작품을 남겼다. 이에 본 컨텐츠는 김종영미술관의 도움으로 김종영선생의 생애와 글 그리고 그의 작품을 통합적으로 소개하고자 기획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을 만나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