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 세브란스 혈액암 명의에서 ‘치유의 화가’로
생명을 다루던 손, 색으로 마음 어루만져…‘예술 부부’로 인생 2막 민유홍 명예교수 “의학으로 구한 생명, 예술로 위로할 것”
[의학신문·일간보사=정광성 기자] “피와 생명을 다루던 의사에서 색으로 삶을 그리는 작가로서 이제는 붓으로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브란스병원 혈액종양내과 민유홍 명예교수<사진>는 30년 이상 백혈병 환자 곁을 지켜온 국내 대표 혈액암 전문가로, 1991년부터 혈액종양내과 교수로 재직하며, 대한혈액학회 이사장과 유한의학대상·보원학술상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 민 교수에게 병원은 단순한 직장이 아닌, 백혈병 환자들의 생명을 다루는 삶의 최전선이었고, 동시에 훗날 화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시발점이었다.
그는 “2022년 정년퇴임 직전 다짐한 세 가지 목표 중 하나가 ‘취미를 갖되, 그 깊이를 더하자’였고, 서양화 특히 아크릴 회화를 그리자는 생각을 했다”며 “처음엔 독학으로 2-3개의 관련서적을 구입해 참고하면서 집 식탁 위에서 스케치북·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전업 화가로서 매진하게 됐다”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민유홍 교수는 교수서 30년간 백혈병 진료와 연구, 후학양성을 하며, 늘 ‘생명의 본질’을 고민했다. 완치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그는 생명이 얼마나 섬세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매일 느꼈고, 그 기억을 색으로 옮겨냈다.
민 교수는 “무균 병실 등의 치료 현장의 모습은 극한의 두려움 단절감 속에서 비록 철저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고, 체념도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며 “그럼에도 매일 희망과 믿음을 되새김질하며 몸과 정신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인간정신을 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작품 ‘무균병실 시리즈’는 의사로서의 기억과 예술가로서의 감성이 만난 결과였고, 제33회 대한민국 기독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이어 제5회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침노 당하는 천국’이라는 작품으로 입상하며, 늦은 나이 독학으로 시작했지만 놀라운 성장속도를 보여줬다.
민유홍 교수는 “기법·기교를 생각한다면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개념과 주제의식이 제 작품의 핵심이기 떄문에, 오히려 은퇴를 한 지금이 적기지 않을까 생각된다”며 “타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축적된 신진 작가랄까”라며 겸손을 보였다.
겸손과는 다르게 민 교수는 그동안 의학자로서 매일 연구하고 고민하고, 배워왔던 것처럼 미술 관련 서적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작품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것이든 배우고 익히며,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고 있다.
혈액암 교수, 아크릴로 생명의 온도를 담다
민유홍 교수는 아크릴화가 가지는 매력에 대해 감정의 연결성을 꼽았다. “유화는 깊고 무겁지만, 아크릴은 순간의 생기를 표현하기에 좋다”며 “물감이 빠르게 마르기 때문에 감정이 증발하기 전에 남길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마음이 통했을까, 2023년 10월 원천아트갤러리에서 ‘예술, 경건에 이르는 연단: 혈액학 전문의가 그려본 구원의 표상들’이라는 첫 개인전에서 민 교수는 관람객과 교감하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그는 “첫 전시회는 그동안 하던 학회의 발표와 다르게 너무 긴장되는 순간 이었다”며 “그때 한 여성 관람객이 ‘네 친구들’이라는 작품을 보고 있어, 제 아내가 작품의 배경과 의미를 설명하자 감동을 받았다며 펑펑울었던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 경험을 통해 민유홍 교수는 ‘내 그림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람객의 마음을 치료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부창부수의 예술, 함께 걸어가는 두 사람의 인생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미술 작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고 있는 민유홍 교수의 곁에는 언제나 든든한 조언자가 있다. 바로 아내다.
민 교수는 “처음엔 제가 그림을 그리면 웃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함께 예술의 길을 걷는 누구보다 제 작품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라며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아내는 섬세한 미적 감각으로 색채·구도·작품의미 등 작품들에 대한 솔직하고 진솔한 의견으로 미술 작가로서의 성장을 돕고 있으며, ‘갤러리스트’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서울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키우고 있다. 남편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더욱 전문적으로 돕기 위해, 인생의 방향을 새로 바꾼 것이다.
이처럼 부부가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예술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고 있는 것.
의학과 독창적 표현을 갖춘 브랜드 될 것
아울러 민유홍 교수는 앞으로의 목표로 의학적인 주제와 독창적인 표현을 갖춘 민유홍 작가라는 브랜드를 구축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민 교수는 “분명한 주제의식과 의학적인 코드가 내재 돼 있는 독창적 표현약식을 통해 낯설지만 깊은 울림과 회복의 메시지를 주고 싶다”며 “진료 현장에서 겪은 불안·기쁨과 환자와의 정서적 교류 등 모든 소중한 체험들을 기반으로 독특하고 창의적인 조형 언어 및 표현양식을 구축해 나만의 브랜딩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이를 위해서라도 매일 조금씩이라도 화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물론 그 길에는 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발을 맞춰 걸어가고 싶다”고 말하며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민유홍 교수는 작가로서 서울 동안교회 로뎀갤러리에서 다음달 23일까지 두 번째 개인전 ‘Christian Artist Way: 동행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진행하며, 사람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