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이번에 미국이 조지아주에서 취한 한국 기술자에 대한 조치를 보면서 여러 느끼는 점이 많다. 내가 알고 있던 미국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글로벌 리더십을 갖춘 나라의 지위를 스스로 버렸다. 전부터 패권주의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것은 맞지만 최소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이기를 원하지는 않았었는데, 이제 미국이란 나라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팬티 벗고도 달려 나오는 ‘도덕이나, 윤리가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로 보인다.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나, 얻을 것이 별로 없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벌써 오래 전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노골적으로 ‘나눠먹자 안 그러면 뺏어먹겠다’는 짐승 쪽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우리를 상대로 이런 일을 꾸미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실력이 여러 면에서 세계의 선두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우리가 선두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일도 많고, 선두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일도 있다. 지난 수 십 년간 우리는 따라잡아야 할 목표가 있었고,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남들이 성공한 길을 따라 가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우리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것을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 많이 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갈 길을 잘 찾아야 할 시기가 왔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부문만은 아닐 것이다. 의료 분야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는 역량과 기술이 많이 있다. 정치권과 정부의 파렴치함을 넘어서는 잘 못된 의료 정책을 극복하고 이루어 낸 결과라 더 귀한 일이다. 대한민국에는 의료 정책이나, 국민 건강의 미래를 위한 정부의 계획은 부재하다. 그런 최악의 환경에서도 스스로 일어서고자 노력한 의사들의 열정과 노력이 이루어 낸 결과이다.
연초에 발표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2025 세계최고의 병원 결과를 보면 전 세계에서 조사된 2,400개 병원 중 250위 내에 포함 된 국내 병원이 16개나 된다. 분야 별로 따지면 100위 내, 종양 분야는 10위 내에 든 병원도 있다.
이 결과는 이제 우리가 남들을 따라하는 시기가 지나, 남들을 지식과 기술로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에서 연수를 나가는 교수들이 방문하는 대학이나 병원을 보면 ‘저기 뭘 배우러 가지?’ 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눈에 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를 함께하러 가는 것인가 하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국내에서 협력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영어 배우러, 또는 자녀 유학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일도 있다. 미국만 가면 무엇이라도 배울 게 있던 시절이 다 지나갔음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기술로 세계의 의료 기술 발전을 선도하고 우리의 지식을 현장에서 전수해 주는 일, 그리고 아무도 생각지 못한 독창적 연구를 하는 일이 우리나라 대학병원의 주요한 업무가 된 시대이다.
어느 병원의 누가 예약이 6개월 밀려 있고, 하루 100명의 환자를 보는 명의가 있다. 이런 미개한 방식은 이제 의료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모든 산업 분야가 주 5일을 넘어 주 4일 근무를 이야기하는데, 의료계는 전공의 주당 근무시간 80시간에서 72시간, 36시간 연속 근무에서 24시간으로 줄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공의 근무시간을 줄이면 스태프의 근무 시간도 줄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늘고 당직도 하게 된다면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일 많이 한다고 아무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의사가 많이 부족해서 생기는 중노동이다. 그러니까 의사를 한해 2,000명씩 늘리고, 전국 지방 도시에도 대학 병원을 세워야 한다는 앞선 정부나, 현 정부의 주장을 반대하는 의사집단은 공공의 적이고 처단 받을 직업인가?
한 번 나가서 세상맛을 보고 온 전공의들이 전처럼 근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재 대학의 젊은 교수들이 그 자리를 지키며 힘든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대한민국의 의료는 바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를 국민도, 정치권도, 정부도 의사도 다 알고 있는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너질 수밖엔 없다.
값싸고, 편리하고, 빠르고, 안전한 것?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 대한민국의 의사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하고, 정부는 장담하던 대로 저임금 중노동을 감당할 의사를 해외에서 데려와야 할 것이고, 국민은 아프면 말이 안 통하는 의사를 만나야 할 것이다. 물론 AI가 다 해결해 주겠지만 말이다. 의료의 천국이 정말로 천국으로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