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면
서울시의사회 최주현 홍보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만약 태아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최근 낙태 논의가 다시 정치권의 주요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일부 단체에서는 전면 합법화, 기간 제한 철폐, 사전 상담 의무 폐지, 약물낙태 도입 등 급진적인 요구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정치인들은 이에 호응하고 있다.
여기서 거슬리고 껄끄러운 것은 ‘낙태’ 대신 ‘임신중지’라는 표현을 사용해 그 본질을 흐리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어를 바꿔 불편한 현실을 부드럽게 포장하려 하지만, 단어의 교체가 행위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임신중지’라는 말 뒤에는 하나의 생명이 조용히 사라지는 현실이 놓여 있다.
헌법은 명시적으로 모든 국민의 생명권을 보호하고 있다. 태아 역시 독립된 생명체로서 헌법적 보호 대상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시가 이미 존재한다. 즉 용어를 바꾼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임신중지는 생명 종결 행위이며, 태아는 법적으로 가장 보호가 필요한 취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법과 제도, 정치가 그 생명을 대신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태아의 권리를 외면하기 쉽다. 이유는 단순하다. 태아는 표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를 가진 존재의 목소리는 크고, 표를 가질 수 없는 존재의 권리는 작아진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다수의 선택에 있지 않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권리까지 지켜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만약 태아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국회는 법안 심사에서 생명권을 가장 우선적인 고려 요소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소중함이 당연하다. 다만 다른 생명체의 생존 자체를 좌우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리가 아니다. 헌법상 생명권은 모든 권리 중 가장 기본이자 절대적인 권리이며, 어떠한 다른 권리도 이를 침해할 수 없다.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정치와 법은 반드시 국가가 최소한으로 보장해야 할 생명의 가치를 먼저 세워야 한다.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기도 하다. 가장 작은 생명에게조차 보호의 손길을 내밀 수 없는 사회가 과연 인권과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되묻고 싶다.
표 계산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지켜야할 윤리적 토대와 원칙, 그리고 헌법적 가치에 따라 판단할 때, 우리는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를 지킬 수 있다. 만약 태아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살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