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회장 흑역사
한국융합복지연구원 원장
<제주 한국병원 흉부외과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우리나라 헌정사에 탄핵 소추된 대통령은 모두 3명이지만, 2000년 이후 불신임 되어 스스로 퇴임하거나 탄핵 심판의 대상이 되거나, 실제 탄핵된 의협 회장은 전체 회장 11 명 중 8명이나 된다. 유성희, 김재정, 장동익 회장 등 3명은 불신임 되어 자진 사퇴(하야) 했고, 추무진, 최대집, 이필수 회장 등 3인은 재임 중 두 번 혹은 한번 탄핵 심판에 올랐다가 살아났는데, 그 와중에 이필수 회장은 의대 정원 확대 사태가 발생하자 자진 사퇴했다. 노환규, 임현택 회장 등 2명은 탄핵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흥미로운 건, 노환규 회장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 대통령과 임현택 회장 당시 윤석열 대통령 역시 탄핵소추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나머지 3명의 회장 중 임기 3년을 꽉 채우고 퇴임한 회장은 경만호 회장뿐인데 그 역시 후임 회장으로부터 고발되어 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신상진, 주수호 회장은 불신임 받지 않았으나 보궐투표로 잔여 임기를 채웠을 뿐이다. 이번에 선출되는 회장도 탄핵된 임현택 회장의 잔여 임기를 채우게 된다.
이렇게 2000년 이후 의협 회장의 흑역사는 24년이나 지속된 셈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우선, 의협 내부의 고질적 갈등과 구조적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협 회원은 의사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사실 매우 다르다. 수십개에 이르는 전공 과목도 다르고, 전공의와 전문의, 전임의, 교수, 개원의 (고용주)와 봉직의 (피고용인) 등 신분도 제각각 다르다. 연령, 성별, 지역적 차이는 물론이다. 같은 업종에 종사할 뿐, 각자 처한 입장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들은 의사라는 공통점으로 연대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서로 처한 입장이 달라 쉽게 의견 일치를 보기 어렵다. 게다가 의사들은 태생적으로 자기 확신과 주장이 강해 좀처럼 뜻을 굽히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들을 설득해 하나의 대안을 만드는 건 매우 어렵다.
그런 가운데 회무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나 입신양명을 우선시하는 임원이 있는가 하면, 현실 정치에서처럼 선전 선동을 일삼고 분열을 획책하는 집단도 있다. 의사들은 똑똑해 쉽게 기만되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가짜 뉴스와 선전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 게다가 일부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회원 간의 ‘다름’ 만이 문제는 아니다. 이 ‘다름’을 설득하거나 이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의 부재가 사실 더 큰 문제이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진료가 본업이므로 의협에서 하는 대정부 활동이나 다른 단체나 기관 과의 협의에는 약하다. 본업을 때려 치우고 이를 전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3년마다 회장이 바뀌고, 덩달아 상임이사 등도 바뀌다 보니 연륜이 짧아 건정심이나 다른 협의체에서 정보력과 논리에 밀리는 경우가 많다. 다른 의료 단체 경우 10년 이상 꾸준히 그 회의체에 참석해 회의체의 과거 이력과 기조를 꿰뚫고 오래 쌓은 친분 등을 활용해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반면, 의협은 회의를 따라가기도 버겁다.
게다가 그 회의체에서 안건을 결정하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다고 거칠게 항의 받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다. 이게 반복되면 안건을 결의하기 전에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는 경우도 생기거나, 결의된 사항을 뒤늦게 번복하는 일이 빈번하게 생기기도 한다.
그 결과, 의협은 다른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대화 못할 대상으로 간주되며, 더욱 더 고립된다. 그 사이 의대 예방의학교실, 보건대학교, 보사연과 보건산업진흥원, 심평원 연구원 등에서는 경쟁적으로 해외의 제도를 도입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으며, 국회는 각종 법 개정을 서두른다. 그럴 때마다 의협은 뒤늦게 대응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우리가 동의 못하는 제도, 정책, 법은 수용할 수 없다’며 또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러니, 의협 임원이 할 수 있는 건 1인 피켓 시위나 삭발 뿐이다. 아니면 비난과 반대 성명을 내며 회원들의 심기를 살필 뿐이다.
이런 총체적 난국의 이유는 의협이 정책을 주도하거나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만명이 넘는 의사가 있지만, 이들은 의료전문가일 뿐 보험이나 정책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협이 해야 할 일은 의협 회원들이 공히 동의하는 의료와 보험 제도, 정책에 대한 마스터 플랜을 만드는 것이다. 또 특정 사안 별로 명확한 입장을 정해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의협에는 이런 것이 없다. 이제껏 미래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미 10년전부터 일각에서는 ACO(Accountable Care Organization, 책임의료기관)과 가치기반 지불제도(Value-based Purchasing), 성과기반 지불제도(Pay For Performance, P4P) 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만일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하면 의협의 입장은 무엇인가? 의협 집행부는 이 제도를 회원들이 알아듣게 설명하고 제도 도입에 대해 회원의 찬반을 묻고, 동의를 구할 수 있을까?
만일 제도 안이 마땅하지 않다면 이미 수년에 걸쳐 관련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제도 모형을 만든 보사연, 심평원 연구원 등의 연구자와 제도 모형을 바꾸자고 제안하거나 장단점을 논하며 제도 도입의 반대나 찬성의 논리를 펴며 협회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의협이 해야 할 일은 뒷북 치며 따라가는 게 아니라 선제적으로 제도와 정책을 내놓는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과거 의협은 그랬다. 의협이 의학의 최고 전문가 집단으로 정책을 제시하고 이끌었기에 의협은 존중받고 권위 있는 단체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은 개원의 대표 기구 정도로 전락했다. 왜? 전문적이지 못한 상임 이사, 논리에 밀리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겨우 동의하고는 곧 바로 결정을 번복하는 믿지 못할 단체, 대화로 조율하자 해도 피켓 시위나 하고 성명서나 발표하는 단체, 이게 지금 의협의 위상이다. 그러니, 의대 정원 확대 같은 사안에서 의협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을까?
의협이 해야 할 일은 우선 건보 지속 가능성을 연구하고, 지속될 수 없다면 새로운 모형의 보험 제도, 지불 제도와 그에 맞는 의료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이다. 수많은 의사와 학자들이 참여하고, 수백번의 토론회를 거쳐 큰 틀을 만들고 다시 세부 사안을 만들어 메꿔야 한다. 그리고 이를 공개해 의사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이렇게 큰 틀을 만든 후 이게 의료계 입장임을 천명하고 제도 개선과 정부 정책 방향이 이 틀 안에 이뤄지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의협은 또 다시 “알빠노, 우리는 무조건 반대”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의협 회장 흑역사의 또 다른 주요 원인 중 하나 조직적으로 회장과 집행부를 음해하고 회원을 선동한 집단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집단들은 누가 회장이 되더라도 꼬투리를 잡아 집행부 흔들기를 해 왔다. 이를 막으려면 회장이 정당하고 명백해야 하며 가급적 많은 회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래야 의협이 무엇을 결정하든 동의와 협조를 받을 수 있다. 또, 그런 빌런과 같은 집단들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그래도 기승을 부리면 척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 고리를 끊지 못하면 앞으로도 불신임 받거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회장이 속출하게 될 것이다.
회장은 투표로 결정된다. 선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상임 이사도 마찬가지이다. 이사로 선임된 자들은 새로 받은 명함과 자리, 법인 카드에 만족할 게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고 직에 임해야 한다. 식상한 얘기지만, 집행부는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의료계와 의사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리이다. 신임 집행부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