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기반 지불제도, 생태계 교란종이 될 수 있다

2024-04-08     의학신문
송우철
한국보건의료정책연구소 이사
<제주한국병원 흉부외과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정부는 지난 318일 행위별 수가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가치 기반 지불제도로 혁신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내에 의료비용분석위원회를 구성해 올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할 예정이라 한다.

가치기반 지불제도는 영국과 미국 등에서 오래 전부터 검토한 새로운 지불제도의 형태이다. 이 제도는 타이틀만 보면 왠지 좋아 보이지만, 이 나라들이 이 제도를 고안한 배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

미국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국가의료보험 없이 민간의료보험 제도를 주요 보험제도로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국가 의료보험 제도를 갖지 못한 건 미국 예외주의 (American exceptionalism)’ 와 미국인들의 독특한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은 여타 유럽 나라와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 기원 자체가 종교 자유를 위해 넘어온 청교도들로 시작해 자유에 대한 절대적 지지,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거부감, 청교도 정신에 기초한 강한 종교성 등이 미국과 미국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성향은 미국의 모든 공공정책에 녹아 있고, 의료보험 정책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가입을 강제하는 국가 의료보험을 반 자유, 연방정부 권한의 강화, 사회주의 정책으로 간주해 도입이 어려웠다.

이때문에 1930년대 뉴딜 정책 도입시부터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에 걸쳐 국가 의료보험 도입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무산되었고 대신 사회보장제도인 MedicareMedicaid로 미국 국민 약 30% 의 의료비를 국가가 부담하고 있다. 나머지 60% 가량은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해 있지만, 여전히 4천만명이 넘는 미국민은 그 어떤 의료보장 제도나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 민간의료보험 의무 가입 즉, 오바마 케어이다.

미국의 또 다른 딜레마는 미국 GDP18.8% (2022), 무려 4.7조달러(7천조원) 라는 막대한 재원을 의료비에 투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 수준은 낮은 편이라는 것이다. OECD 자료에 의하면 2021년 미국 남여 평균 기대 수명은 76.4년으로 OECD 평균인 80.3세 이하이며 OECD 38개국 중 32위였다. 영아 사망율 역시 32위이며 당뇨, 치매, 회피가능사망률 등이 모두 OECD 평균 이하이다.

이러니 의료비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성과보상 지불제도 P4P(Pay for Performance)와 가치기반 지불제도 VBP(Value Based Purchasing) 이다. 또 같은 맥락으로 오바마 케어 이후 책임의료조직(ACO, Accountable Care Organization)의 설립을 도입했다.

ACO 란 의료기관들이 그룹을 이루어 이 그룹에 가입한 환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이다. 초기 ACO는 메디케어 수급자들을 대상으로 정부로부터 수급자 당 일정금액을 제공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인두제와 유사하나, 인두제(capitation)는 나이와 성별을 기준으로 비용을 지불할 뿐, 개인의 건강 상태나 질병 유무를 따지지 않았다. 따라서, 수급자당 동일 비용을 지불 받을 때, 질병이 있는 환자의 진료를 꺼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ACO는 가치기반 지불제도를 적용해 치료 결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를 지불하고 반대의 경우, 디스인센티브를 부과한다. 지난 2월 발표한 건강보험종합계획에도 국내에 ACO 도입을 검토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영국의 경우, NHS를 영국의 정체성이며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영국 국민을 치료하는 의료비의 98% 가량이 NHS를 통해 영국 정부의 세금으로 충당되는데 23/24년 영국 정부가 지불한 NHS 비용 포함 보건 예산은 245 billion 파운드 즉, 한화 417 조원이 넘는다. 같은 해 영국 정부 예산은 약 2,000 조원 가량이므로 약 20.1 %가 보건 예산에 소요된 것이다. 영국 보건 예산은 교육, 국방 예산을 합친 것보다 크다.

그런데, 이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NHS는 이상적 의료 시스템하기 어렵다. 20238월 영국 노동당은 진료대기자 명단에 오른 환자 127천명이 진료 받기 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 속에서 생애 마지막 몇 달을 보내며, 우리가 필요할 때 곁에 있을 것이라는 NHS의 기본 약속이 깨졌다'고 말했다.

, 가디언 지에 따르면 20236월 기준, 진료 대기자의 숫자는 760만명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으며, 대기자는 곧 9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미 심장질환자 40만명 중 37%는 진료를 받는 데 18주 이상이 걸렸고, 치료가 시급한 심장질환자 12,799명도 1년 이상 기다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영국의 병실은 약 98%가 차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영국인들은 고가의 민간 병원으로 이용하거나 해외로 원정 치료를 가는데, 2019년 한해에만 약 24만명이 치료를 받기 위해 동유럽 등으로 갔다.

게다가 막대한 정부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영국의 건강지표는 그에 걸 맞는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영국의 병상 보급율은 낮고, 환자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효율적 의료 이용에 대한 모색을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영국은 여러 정부 기구를 통해 질혁신생산성 및 예방 추진 계획 (Quality Innovation and Productivity and Prevention initiative) 을 수립하고, 가치기반보건의료 (Value-Based Health Care, VBHC) 를 도입하고 있다.

P4PVBP, VBHC, ACO는 성과, 가치, 책임 등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상은 지나치게 높은 의료비를 줄이고 투자 대비 낮은 의료 실적을 높이려는 궁여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방점을 찍어 할 부분은 '지나치게 높은 의료비'이다. 왜냐면 미국, 영국 의 의료비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높기 때문에, 영미는 이런 제도로 의료비를 줄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저수가 정책을 고수하는 나라이다. 단순 저수가가 아니라 원가 이하의 수가이다.

그러니 영미와 우리 의료재정 환경은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런데, 외국이 한다고, 혹은 새로운 기조라며 마구잡이 들여올 수 없다. 복지부 차관은 행위별 수가제를 유지하면 늘어나는 고령화의 의료비 지출을 감당해 내기가 어렵다가치기반 지불제로 혁신해 나가 건보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가치기반지불제도 도입 목적이 의료의 질보다는 의료비 감축이며, 특히 고령화 의료비를 줄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고령환자는 더 많은 치료비를 투입해야 하고, 예후는 더 나쁘다. , “가치기반의 가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가치기반 지불제를 채택할 경우 고령환자를 많이 볼수록 의료기관은 디스인센티브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의료기관은 고령 환자 진료를 회피하거나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의료는 파행과 난맥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과거에도 우리 의료 제도, 보험 환경에 맞지 않는 제도들이 일부 학자나 연구 기관들에 의해 들어 와 해외유입 교란종처럼 우리 의료 생태계를 위태롭게 한 바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포괄수가제(DRG)인데, 그 유래인 미국 포괄수가제는 미국 병원이 보험관련 사무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만든 것이다. 의료비 감축이 주 목적이 아니란 것이다. 미국 병원은 메디케어 등 국가보험, 수십개에 이르는 보험회사 등이 요구하는 서류 양식이 제각각 이라 청구서류 작성 자체가 커다란 업무이다. 한 자료 (Health Affair)에 의하면 보험료 청구 등 보험관련 사무에만 미국 의사 한 명당 연간 평균 82천불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포괄수가제를 진료비 억제 방안으로 들여와 사용했다. 그 결과 안 그래도 위태로운 산부인과를 아예 붕괴시켰다. 하물며, 가치기반지불제도는 영미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제도이다. 그런데 오로지 지불 억제 목적으로 이를 들여온다?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