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노조, '임시변통 정책' 규정 '시범사업 논의 중단' 요구
노동환경 개선이 본질···간호사 1인당 환자 수 법제화 도 주장

[의학신문·일간보사=진주영 기자] 정부 등에서 간호사 유연근무 시범사업 논의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이를두고 '임시변통 조치일 뿐 실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7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하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나순자)은 성명서를 통해 간호사 유연근무 시범사업 논의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대한간호협회와 대한병원협회가 주최한 ‘일·가정 양립을 위한 다양한 간호사 근무형태 도입 토론회’에서 간호사 유연근무제 시범사업이 제안됐다.

이날 발제에서는 ▲단축시간제 ▲휴일전담제 ▲2교대제 ▲고정근무제 ▲재량근무제 등 다양한 근무형태를 의료현장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보건복지부 관계자도 시범사업 제안 취지에 공감하며 시범사업의 의지를 강력히 내비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지난 25일 보건복지부와 대한병원협회, 대한간호협회 등 직종협회가 모인 ‘보건의료발전협의체’ 2차 실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됐으며, 더욱 구체적인 내용은 분과 협의체에서 논의한다는 계획까지 공개됐다.

또한 지난 26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인 ‘이용자중심의료혁신협의체’ 3차 회의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간호인력 근무환경 및 처우개선’ 항목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상 정부가 시범사업 추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간호사가 일·생활 균형이 어려운 이유는 인력부족으로 인한 장시간 노동과 예측 불가능한 교대근무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보건의료노조의 주장이다.

대가도 받지 못하는 공짜노동이 만연하고, 타 직종의 업무까지 떠안고 있는 간호사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쪼개기 노동이나 12시간 장시간 노동을 권장하거나 양산하는 처방이 아니라 활동간호사의 인력을 늘리기 위한 '처우개선'이라는 정공법이 필요하다고 봤다.

특히 보건의료노조는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이행하지 않은 현시점에서 보건복지부가 나서‘유연근무제’를 펼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잘못된 행보다"고 말했다.

2020년 보건의료노조 조합원 실태조사는 총 7만 명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설문에 응답한 3만 5614명의 설문자료를 최종 분석한 결과, 직장생활 만족도는 임금수준(36.8%), 인력수준(23.9%), 안전보건(53.1%)에서 저조한 수치를 보였다.

이직 고려 경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21.7%)’와 ‘가끔씩 생각한 적이 있다(44.9%)’는 3년 사이에 매년 1~2%포인트 이직 고려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3개월간 이직 고려사유는 ▲열악한 근무조건 및 노동강도(46.9%) ▲낮은임금수준(29.8%) ▲다른직종으로 직업변경(18.3%) ▲직장문화 및 괴롭힘(14.4%) 순으로 나타났다.

결국 유연근무제의 국가 차원의 확대는 노동자의 일·생활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평균적인 일자리의 질을 떨어뜨리며 가족돌봄에 대한 부담을 여성노동자에게만 지우는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보건의료노조는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41.5%(남성은 26.3%)에 달하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53.6%(남성은 25.1%)가 불안정한 시간제 노동자라는 단순한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노동시장의 성별 불평등은 남성노동자에게 돌봄권을 보장하고, 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간호노동의 전문성을 더욱 강화하기 보다는 저임금·불안정·비정규 노동으로 돈도 벌어야 하는 이중 노동의 굴레를 강화하는 것으로 될 우려가 더욱 크다”고 "인수인계 시간만 늘리고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는 악수라는 점을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인력부족으로 장시간 노동을 피할 수 없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개인이 단축시간제를 선택한다고 해도, 일은 그대로고 임금만 줄어드는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12시간 2교대 근무제는 근무 일 수를 줄인다고 해도 휴식시간이 보장되지 않고 연장근로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동자 건강권 심각하게 침해하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실제 2010년 이명박 정권 당시, 여성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남성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나온다며 ‘퍼플잡’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면서 시행한 ‘공공기관 유연근무제 확대정책’에서 6개월간 11개 기관을 대상으로 한 시범사업 신청률은 0.73%에 불과했다.

또한 이 사업이 확대 적용된 일부 공공병원에서는 기존 정규직 업무를 단시간 근로자로 대체하는 악영향만 불러왔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같은 취지로 펼친 공공기관에 강제 할당 방식으로 추진됐던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정책도 이렇게 채용된 시간선택제 간호사의 경우 6개월 이내에 70%가 퇴사했다고 알려졌다.

보건의료노조는 "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다가온 상황에서 중환자를 간호할 숙련된 간호사의 부족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며 "정부가 나서 중증환자 전담 간호인력을 양성하고 있지만 3주~8주 양성과정은 재난 상황에서의 응급조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필요한 것은 시간제 간호사 확대와 같은 유연근무의 확대와 같은 역주행이 아니라, 간호사들이 오래 일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로 바꾸는 것”이라며 “간호인력 배치기준 강화 시범사업, 직종별 인력기준 마련, 모성정원제도 도입, 교대근무자의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 등 직접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해 주는 것에서부터, 직종별 업무범위 명확화, 상시지속 업무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을 추진하는 것과 같은 정책들이 지금 당장 추진해야 할 정책들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법제화 돼야

의료연대본부도 간호사 근무형태 시범사업 계획안을 전면 검토하라며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법제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호사 1명당 환자 수가 줄지 않은 상황에서 근무형태만 달라진다고 해서 간호사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문제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여성이 육아를 담당해야하는 주담당자로 보고 있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의료연대본부는 “여성 간호사에게 필요한 것은 육아를 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비용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임금과, 자신의 경력을 꾸준히 개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다”며 “모든 사업장에 어린이집 설치도 제대로 못해내면서, 간호사의 노동시간을 병원의 입맛에 맞게 뚝 자르고 경력을 제대로 개발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일자리를 만들어내려는 정부·여당의 수작질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간호사가 이직과 경력단절을 줄이고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방법은 인력충원을 통해 간호사가 봐야할 환자수를 줄이고 지금까지 주지 않았던 시간외수당과 체계적인 간호사 교육 등을 제대로 제공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의료연대본부는 “정답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복지부가 제일 문제"라며 노동조건 변화 없이 반쪽짜리 일자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간호사도 자신의 경력을 버리지 않은 채 일을 지속하면서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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