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화, 장기간 지속적인 투자 보장돼야 결실 맺어…백신 확보 위한 투자도 이뤄져야
[기획 - 백신정책 문제와 해결방안…②합리적인 해결책은?]

2018년도 어르신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홍보 포스터. 올해는 백신 생산 계획 수립이 지연돼 예년보다 약 3주 늦게 어르신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이 시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국가예방접종은 대외환경 변화 등으로 인해 그 시행계획에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의학신문·일간보사=안치영 기자] 자급화로 해결? 전문가들 ‘한참 남았다’

연례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백신 품절·품귀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빼든 칼은 다름 아닌 백신자급화다. 국산 백신 개발을 활성화시켜 백신 수급난을 해결하자는 목적인데,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단시간 내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강진한 대한백신학회장은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정부가 백신자급화를 위해 투자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시장에 나온 국산 NIP 백신은 독감과 뇌수막염, 수두 뿐”이라고 지적했다. 14년간 백신 자체 생산에 공을 들였지만, 아직도 전체 백신의 75%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백신 자급화를 위한 투자 규모도 국제 수준에서 한참 떨어진다. 강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백신을 개발했거나 개발 중인 다국적사들의 백신 개발 R&D 규모는 약 8000억원에서 많게는 1조4000억원 수준이다. 연구개발인원 또한 박사급(Ph.D) 인원이 연간 1500~1800명 정도가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국내 규모는 주요 백신업체들의 연구 인력을 다 합쳐도 박사급 인력이 100명을 채우질 못한다.

기술력 자체를 올려야 한다는 숙제도 있다. 강진한 교수는 “업체들이 아직 기술력이 부족함에도 불구, 기본형 백신이 아닌 프리미엄 백신 개발에만 포커스를 두고 있다”면서 “기본부터 생산하고 차츰 더 나은 형태, 즉 베터형으로 가는 것이 전략적인 선택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커지는 위기…업체의 ‘반정부’ 기류 확산과 글로벌 환경 악화

백신업계는 더딘 백신자급화와 끝없는 백신 부족 현상 속에서 시장 자체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내사를 포함, 시장 규모에 비해 이미 너무 많은 백신 업체가 과다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국가 발전이 더뎌 백신 수요 자체가 거의 없었던 개도국들이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주요 백신에 대한 접종률이 상승, 글로벌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낮은 글로벌 단가를 ‘자랑하는’ 국내 백신 정책으로 인해 수급 우선 순위에서 점점 더 밀려나는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더욱 큰 문제는 정부가 백신 업체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다. 이미 정부가 요청하는 공급량을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은 모든 백신업체가 알고 있는 사항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가 백신 수급을 긴급히 요청할 때 거부했을 경우 ‘본보기’로 처벌을 받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업계가 더욱 긴장하고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한국백신을 피내형 백신 공급을 중단을 통한 출고조정행위를 범했다는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 임원을 검찰에 고소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법적 처벌 유무를 떠나 업체들이 정부의 수급 계획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더욱 보수적으로 생산 계획을 잡을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정부와 백신 업계와의 거래 관계는 정부의 수급 계획 전달 이후 백신 업체들이 자율 생산을 진행했는데, 업체들이 혹여 부족 분량에 대한 고려를 생각하지 않고 최소한도의 생산을 통해 백신 수급 조절 가능성 자체를 없앨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를 의식해서일까, 그간 공급요청서조차 발행하지 않았던 질병관리본부는, 최근 백신업체들에게 백신이 필요한 경우 공급요청서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신업계, ‘사업성 인정하고 기획생산 시스템 이해해 달라’

백신업계가 주장하는 바는 ‘적정한 가격’과 ‘기획생산 시스템에 대한 이해’이다. 백신 수급 우선 순위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으려 한다면 최소한도의 가격 보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백신 업계의 입장이다. 담합이나 폭리의 입장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닌, 상호간의 적정한 가격 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백신 업계 또한 적정한 마진이 유지돼야 추가적인 백신 개발로 이어나갈 수 있다.

이와 함께 백신 업계는 백신 생산 시스템이 기획생산 형태인 점을 인정,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상호간 최선을 다하고 약속된 사항을 최대한 이행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정부와 백신업계간 신뢰관계가 갈수록 깨져나가는 상황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수급 불안정 등의 변수 상황이 발생했을 시 정부와 업체가 서로를 믿고 협력해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우리는 이미 정부와 고어사가 인공혈관 공급 불안정 사태가 언론을 통해 퍼져나가고, 이로 인해 정부가 협상에 나서 상호 협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채 공급이 재개된 경우를 경험한 바 있다.

백신자급화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백신 개발을 위한 최소 인프라 조건을 갖춘 것에 만족하지 말고, 국가와 기업이 함께 힘을 모아 백신자급화를 위한 길고 긴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 다만 백신자급화는 내수용만으로는 무리며, 수출 방안과 함께 고민해봐야할 것이라는게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