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혁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 겸 홍보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의료계에서 부쩍 쓰임이 많아진 소위 ‘심평의학’이라는 용어를 일반 국민에게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던 중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문득 연상됐다. 노상강도인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침대 크기에 맞게 나그네의 몸을 잘라 내거나 늘여서 죽였다. 그 침대에 맞는 나그네는 아무도 없어서 모두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가장 난처한 경우가, 급여기준에서 벗어나면 환자가 기꺼이 돈을 더 내겠다고 해도 불법이라서 아예 치료가 안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 때다. 환자들은 100원짜리 약 한 알마저도 급여기준에 묶여있다면 100만원을 주더라도 처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어?’ 라고 반문한다.

임의비급여 즉, 의사와 환자간의 계약관계를 현행법은 원천적으로 불법화하고 있다. 최근 임의비급여 판결에서 조건부 인정이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불법임에는 변함없다. ‘단일 보험체계인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하여’라는 구실을 대지만, 급여기준에서 벗어나 한번만 더 항암치료를 하면 나을 것 같은 환자를 눈앞에 두고 급여기준대로만 치료하기에는 의학적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급여기준을 벗어나 환자를 열심히 치료해도 의료기관 운영에 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범죄자가 되기 십상인 현실에서, 의사는 양심을 뒤로 한 채 급여기준대로 치료하게 되고, 적자에 허덕이는 의료기관은 이 같은 의사의 의학적 괴로움에 신경써줄 여지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단일보험체계에서 ‘돈줄’을 쥐고 있는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힘은 무소불위일 수밖에 없다. 의사들은 환자의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급여기준을 의학전문가인 의사들과 상의할 것을 꾸준히 주장해 왔다. 하지만 주지하듯 복지부와 공단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급여기준에 의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의사들 수입만 늘려주는 결과라고 왜곡선동마저 했다.

불행하게도 의료기관들은 삭감으로 인한 손해와 경영 타격을 기꺼이 감내하면서까지 의학적 판단과 의사로서의 양심을 지켜나가기 어렵다. 이미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의학적 도덕성을 지키도록 배운 의사들이 주인이 아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심평의학은 의료기관의 수입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환자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이렇게 중요한 ‘급여기준’을 잘 만들기 위해서 복지부, 공단, 심평원은 더욱 노력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공단의 돈은 조직을 운영하는데 방만하게 쓰이고, 심사평가원은 수천억 원의 건물을 짓는 데 여념이 없다.

가입자인 환자단체는 환자를 살리는 데 진짜 필요한 의료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당장 2~3인실 병실료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 급여화를 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당장의 의료비를 아낄 수 있겠지만, 정작 환자의 치료와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MRI 급여화도 마찬가지다. 환자 본인부담금이 줄어들어 환자에게 이로울 것 같은데, 왜 의료계가 반대할까? 한정된 재정 안에서의 갑작스러운 급여화는 행위량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오고, 이는 보험재정과 국민의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MRI 급여화로 당장 환자부담금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낮아진 비용으로 인한 쏠림을 부추겨 오히려 치료의 기회가 줄고 부담만 더 키울 가능성이 높다.

복지부가 이러한 의료계의 경고를 무시하고 MRI급여화를 강제하게 된다면 의료기관은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결국 범법자가 될 수 없기에 ‘심평의학’에 맞추어서 진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정말로 MRI를 급하게 찍어야 할 상황에서 수백 수천만원을 준다 해도 찍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이전처럼 병원의 도덕성을 들어 무차별적인 삭감을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사-환자간의 신뢰는 깨지고 의료기관들은 줄도산하게 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현 단일 건강보험제도 하에서의 복지부와 공단의 무책임한 행정 편의적인 ‘심평의학’의 본질이다.

무책임한 급여기준으로 인해 환자 건강이 방치된 사례는 이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면 최근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사건. 이 또한 큰 틀에서 보면 ‘심평의학’ 폐해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신생아중환자실은 기본적으로 현대의학이 아니면 원래 살기 힘든 환아들을 치료하는 곳이다. 물론 현대의학의 힘으로도 다 살릴 수는 없다. 외국에 비해 1/5도 안되는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고, 열악하지 짝이 없는 진료환경은 당연히 ‘심평의학’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숙아 생존율은 선진국에 비교하여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병원 내에서 착취에 버금갈 정도의 희생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 희생양은 지금 ‘업무태만’이라는 굴레를 쓰고 차가운 구치소에 갇혀 있다.

차라리 환자를 해치는 ‘심평의학’에 항거하여 보다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었다면 덜 억울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심평의학’이 환자건강을 해치는 공공의 적임을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잘 알릴 수 있을까? 진료실에서 숱하게 이야기하지만 국민들은 상상하지 못한다. 착취에 가까운 진료환경에서도 나름 환자를 위한다고, 금전적 손해와 범법자가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직업적 보람을 찾아보려 하는 우리 의사들이다. 이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복지부와 공단의 편의적인 행정이 의료진을 두 번 죽이고, 환자건강을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 의료인들이 각자의 의업 현장에서 심평의학의 가면을 벗기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