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65)

유형준 의사 문인 열전

[의학신문·일간보사]

“당신의 기술, 그 마지막 최선의 노력, / 삶을 형성하고 의지를 지배하는, / 선의의 힘! 나누어 주소서: / 내 열정의 불을 식히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 저를 제 욕망의 재판관으로, / 제 마음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소서.” -<번역 유담>

그림, 아켄사이드.(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림, 아켄사이드.(출처. 퍼블릭 도메인)

열여덟 살의 아켄사이드가 쓴 시 『과학 찬가』의 일부다.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에서 태어난 아켄사이드(Mark Akenside, 1721~1770)는 일곱 살 때 아버지의 정육점에서 놀다가 정육칼이 발에 떨어져 평생 절뚝거렸다. 열여섯 살에 주요 정기간행물인 《젠틀맨스 매거진》에 「거장」이란 시를 보냈다. 이 작품은 단 열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유난히 조숙한 시작(詩作)기법으로 당시 영국 시단을 놀라게 했다. 이후 계속해서 시를 발표했으며, 열일곱 살에 훗날 자신을 문단의 스타로 만들어 준 『상상의 즐거움』을 쓰기 시작했다.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던 부모는 열여덟 살 아켄사이드를 에든버러 대학 신학부로 보냈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배우길 열망했던 의학을 공부했다. 문학에서 보여준 재능은 의학에서도 그대로 빛났다. 열아홉 살에 에든버러 의학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독창적 사유로 철저히 준비한 그의 발표는 학회에서 늘 논평의 주제였다.

스물세 살에 고향에 돌아와 개원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이태 만에 닫았다. 곧 그의 실력을 잘 아는 절친한 친구가 런던 블룸즈버리 스퀘어에 병원을 차려주어 쾌적한 환경에서 진료할 수 있었다.

스물다섯 살에 그때 가장 유명한 잡지인 《뮤지엄(Museum)》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많은 산문 에세이를 기고했다. 이 일이 끝난 후 산문이나 운문으로 된 소책자를 간간이 출판했지만, 거의 전적으로 의업에 전념하며 의사로서 꾸준히 명성을 얻었다. 평판은 더욱 높아졌고, 서른두 살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왕립 의사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서른여덟 살부터 런던의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근무하며, 조지 3세의 왕비 주치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시집 『상상의 즐거움』(1744년)은 아켄사이드를 문학계 스타로 만들었다. 앞서 이른 대로 열일곱 살부터 쓰기 시작하여 육 년 만에 세 권으로 간행하였다. 밀턴에서 비롯된 무운시(無韻詩) 형식의 이 작품은 2,000행 속에 시적(詩的) 주제가 아닌 철학적 추상을 신중하고 기품있게 담아냈다. 시는 많은 찬사를 받았고, 윌리엄 워즈워스, 새뮤얼 콜리지, 키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제1권은 상상력을 형성하기 위해 결합하는 지적 특성의 기원, 이러한 지적 특성을 사용함으로써 지각과 발명에서 야기되는 향유, 그리고 삶과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그것들에 의해 진화되는 다양한 아름다움 등을 노래한다. 제2권에서는 상상을 철학과 구별하고, 상상을 강화하는 우연한 쾌락을 열거하면서 상상에 대한 열정의 작용을 우화적 환상으로 묘사한다. 제3권은 인간의 예절을 관찰하는 즐거움에 대한 담론, 악덕의 근원에 대한 탐구, 상상의 작품을 생산할 때 마음의 작용을 설명한다. 이 시는 잘 형성된 상상에서 생기는 이점에 대한 설명으로 끝맺는다. 『상상의 즐거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솔깃한 마음을 감동케 하는 / 이 멋진 자연의 틀이 지닌 매력에 끌려; / 시인의, 또는 화가의 독한 고역이 / 자아내는 아름다운 모방이 파생되어 나오는 / 즐거운 창고; / 나의 시가 펼쳐진다” - <번역 유담>

송가 형식을 즐겨 쓴 아켄사이드는 '영국의 핀다로스'로 여겨지기를 좋아했다. 그리스의 핀다로스는 뛰어난 합창 시인으로 올림피아 제전의 우승자 축시 등을 지었다.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가끔 시나 산문을 출판하며 지냈다. 런던의 자택에서 발진티푸스로 사십육 년 육 개월의 길지 않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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