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8>

뉴욕, 세계 미술 중심지 Ⅱ

[의학신문·일간보사] 1978~79년 페기 구겐하임은 자신의 전기 작가 재클린 웰드와 마지막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본인의 가장 큰 업적은 잭슨 폴록을 발굴한 건가요?” “네, 그렇게 생각해요.” “컬렉션은요?” “그것은 두 번째 업적이죠.”

2017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는 바로 이 인터뷰 장면으로 시작한다.

20세기 미술사에서 페기 구겐하임은 영화제목 그대로 미술작품 수집 중독자였다. 그 독특한 수집 취향과 두 번의 이혼 그리고 수많은 남성 작가와의 편력으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미술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구겐하임’은 꽤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부터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도시재생’ 사업의 성공사례로 스페인의 쇠락한 공업도시 빌바오가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 개관한 것을 꼽기 때문이다.

또한 뉴욕시에 있는 독특한 나선형 구조의 구겐하임미술관은 2000년 백남준과 2011년 이우환 전시가 열려 더욱 친숙하게 되었다.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은 정확한 명칭은 솔로몬 구겐하임미술관이다. 솔로몬은 페기의 큰아버지다. 아무튼 구겐하임미술관이 유수의 세계적인 미술관과 다른 점은 뉴욕에서 시작해서 빌바오, 베네치아 등에도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을 개관함으로써 미술관의 국제화와 기업화를 선도했다는 점이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국제화·기업화 선도

페기의 할아버지 마이어 구겐하임은 스위스계 유대인으로 1847년 미국에 이민 와서 은광과 제련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의 7남 3녀 중 넷째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그는 1920년대 말부터 화가이자 비평가였던 힐라 리베이의 조언을 받으며 현대 미술작품인 비대상회화와 추상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솔로몬은 1937년 재단을 설립하여 현대 미술작품 수집에 집중했으며, 1939년에 ‘비대상회화미술관’을 뉴욕에 개관하였다. 솔로몬의 타계 3주기가 되던 1952년 그의 컬렉션을 토대로 지금의 구겐하임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재단은 설립되던 1937년부터 1952년 구겐하임미술관 개관까지 전시보다는 작품 수집에 열중하였다.

페기의 아버지 벤자민은 마이어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벤자민은 페기가 13살이던 1912년 비운의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영화 ‘타이타닉’에서 묘사된 바로 그대로 신사답게 정장을 차려입고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당시 ‘뉴욕타임스’ 기사로 전해진다.

페기는 1910년대 사진작가 스티글리츠가 뉴욕에서 운영하던 291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위적인 현대미술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20년 파리로 이주하면서부터다. 당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던 몽파르나스에서 페기는 그들과 교류하며 작가들을 지원하게 되었다. 페기가 현대미술에 눈을 뜨도록 조언해 준 사람이 바로 20세기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이었다. 페기는 “그가 없었다면 내가 무엇을 했을지 모른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교육시켜야 했다. 나는 현대 미술작품들을 구분할 줄 몰랐는데, 그가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추상미술 간의 차이를 가르쳐 주었다”라고 말했다.

페기,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작품수집 나서

페기는 뒤샹과 더불어 영국의 시인이자 예술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의 조언을 받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 초현실주의와 다다 같은 전위적인 미술작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면서, 1938년 런던에 ‘구겐하임 존느’ 화랑을 열었다. 페기는 전시를 통해 보수적인 런던 화단에 대륙에서 전개되고 있는 전위미술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작품 판매 부진으로 이듬해 화랑을 닫아야 했지만 대신 현대미술관이 없던 런던에 허버트 리드를 관장으로 위촉하여 현대미술관을 건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페기는 자신의 꿈마저 접지는 않았다. 전쟁이 벌어졌음에도 그는 허버트 리드가 미술관을 준비하면서 자신에게 제시한 개관전 초대 작가명단을 가지고 다시 파리로 갔다. 명단을 바탕으로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의 위험 속에서 파리로 간 페기는 “하루에 한 점씩 사려고 했다.” 전쟁 탓에 파리의 화가들은 작품판매가 어려워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수집가들은 소장품을 보존하기에도 힘들었기 때문에 작품가격은 급격히 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페기 같은 광적인 수집가가 나타난 것은 작가와 수집가들에게는 천운이었다. 또한 당대 대표적인 전위 미술가들의 작품을 헐값(?)에 수집할 수 있었던 페기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하지만 페기는 유대인이었다. 게다가 히틀러가 퇴폐미술이라고 규정한 현대미술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었으니, 나치 점령 하 파리에서는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페기는 1940년 12월 마르세유에 소재한 배리언 프라이가 이끌던 구호위원회에 50만 프랑을 기부해서 작가들이 미국으로 귀국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페기의 기부금으로 앙드레 브르통 같은 전위적인 화가들이 전쟁을 피해 뉴욕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1941년 페기는 자신이 구입한 작품들을 전부 뉴욕으로 가지고 왔고, 이듬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57번가에 ‘금세기 갤러리’를 개관해서 파리에서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페기, 초현실주의-추상표현주의 가교 역할

‘금세기 갤러리’는 뉴욕이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기의 갤러리는 유럽에서 온 전위미술가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고, 미국의 젊은 미술가들은 그들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게 되었다. 특히 페기는 젊은 미국 미술가들의 전시를 개최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로써 ‘금세기 갤러리’는 장래 ‘뉴욕화파’로 불리는 ‘추상표현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드리핑’(dripping)이라는 ‘뿌리기 기법’ 그림으로 미국 출신 작가로는 처음으로 세계적 화가가 된 잭슨 폴록이다. 폴록은 페기의 유일한 전속작가였다. 페기는 “추상표현주의는 나의 화랑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한마디로 페기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가교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돌연 1947년 뉴욕을 떠나 베네치아에 미술관을 마련했고, 1979년 그곳에서 타계하였다. 생전에 페기는 자신의 컬렉션을 큰아버지 솔로몬의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한편 페기는 베네치아로 떠나고 10여 년이 지난 후의 미국미술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 내가 뉴욕을 떠나 있었던 12년 동안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미술 운동 전체가 거대한 투기사업이 되어 있었다. … 사람들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가장 비싼 것만 구입한다.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서 감상은 커녕 창고에 넣어 두고 최종가를 알기 위해 매일 화랑에 전화를 걸어 대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주식을 가장 유리한 시점에 팔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요즈음 생산되는 미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미술은 그림을 돈으로 보는 태도로 인해 엉망이 되고 만 것 같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돕고 부추겼다는 이유로 지금 생산되는 미술에 대해 나를 비난하지만,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18년 전 미국 미술계에는 순수한 개척정신이 있었다. 새로운 미술 운동인 추상표현주의가 태어났던 것이다. 나는 그 운동을 지원했고,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

페기는 평소 “난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예술가 후원을 위해 일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작가들을 조건 없이 후원했다. “그들로부터 충분히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페기는 “보답을 바라지 않았어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인류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 걸로 충분하죠”라고 대답했다. 페기 같은 후원자가 있었기에 뉴욕은 20세기 미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뉴욕이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는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과 광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구겐하임 가문 이외에도 철도와 해운으로 부를 축적한 벤더빌트 가문도 일조했다. 거투르드 벤더빌트 휘트니는 ‘휘트니미술관’을 세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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