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7>

뉴욕, 세계 미술 중심지 Ⅰ

[의학신문·일간보사] 세계금융의 중심지라 하면 당연히 뉴욕 맨해튼의 월가를 꼽는다. 그런데 맨해튼에는 유수의 금융기관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세계 4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박물관과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뉴욕현대미술관(NY MoMA)이 있다. 이와 더불어 휘트니비엔날레를 개최하는 휘트니 뮤지엄과 2000년 백남준과 2011년 이우환의 회고전을 개최한 구겐하임미술관 등이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비싼 임대료 탓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하고 있지만, 2017년 뉴욕시에 거주하는 미술가, 배우, 음악가, 댄서, 사진작가는 계속 증가하여 그 수가 5만5000명 이상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들 중에 미술가가 가장 많을 듯싶은데, 뉴욕시에는 무려 1500개 이상의 갤러리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9년 기준으로 44%로, 2위를 차지한 영국의 20%와는 두 배 이상의 격차를 보일 만큼 독보적이다. 그래서 전 세계 미술가들에게 뉴욕시는 현대미술의 최고 중심지로서 선망의 장소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뉴욕현대미술관에 초대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美, 세계 미술시장 44% 차지 독보적

미국은 1776년 영국에서 독립하여 불과 245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짧은 역사의 나라, 일개 도시 뉴욕이 어떻게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이런 궁금증은 사실 좀 오래되었다. 1957년 4월 덕수궁 국립박물관에서 ‘미국 현대 8인 작가’ 전이 개최되어 실제 미국 동시대 미술작품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낸 고 이경성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8인전을 계기로 우리가 얻어야 할 점은 미국미술의 특질을 맛보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것을 계기로 미국미술을 연구하여 무슨 방법으로 그들이 미술사적 전 코스를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달리어 현대에 도달하였는가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미술의 연구는 미술사적 현대로 이행하려는 오늘의 한국화단에 많은 시사와 계시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낙후된 한국미술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짧은 역사를 넘어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우뚝 선 미국미술계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이 20세기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 동기는 보통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해 유럽의 화가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단편적인 서술로 단순히 하나의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 그들이 왜 미국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좀 더 입체적인 통찰이 필요한데, 지난 세기 초 미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미국은 독립할 당시 유럽과는 달리 통치체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화정을 토대로, 삼권분립 하에 임기를 제한한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이렇게 탄생한 근대국가 미국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간 내전을 치렀으나, 1870년대 이후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강도귀족’(Robber baron)이라 불리는 거대 재벌이 탄생했다. 대표적인 예가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석유왕 존 록펠러, 금융왕 J.P 모건, 철도왕 윌리엄 밴더빌트 같은 기업인들이다. 그들이 강도귀족이라 불린 이유는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시장을 독과점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오명을 씻기 위해 학문과 문화예술 분야에 막대한 재산을 기부했다. 예를 들어 카네기는 재단을 만들어 미국 전역에 공공도서관과 뉴욕에 카네기홀을 짓고, 지금의 카네기멜론대학의 전신인 카네기기술대학을 설립했다. 모건은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을 메트로폴리탄 미술박물관에 기증하였고, 밴더빌트는 밴더빌트대학을 설립했다. 이들 가운데 록펠러 가문이 오늘날 뉴욕이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2007년 경제잡지 포브스(Fobes)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로 존 록펠러를 선정했다. 그의 재산은 2006년 달러 가치로 3053억달러였다.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35조 8500억 원이다. 당시 최고 부자 빌 게이츠가 13위에 올랐고, 2021년 우리나라 예산이 558조 원이니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재산 규모가 어림짐작이라도 될지 모르겠다.

존 록펠러 재단 설립 학문·예술 지원

아무튼 독과점 악덕 기업주 존 록펠러는 1913년 록펠러재단을 설립해서 학문과 예술을 지원했고, 자선사업을 펼쳤다. 그는 악덕 자본가라는 이미지를 쇄신하려 했고, 거기에 연방정부의 문화정책이 한몫했다. 즉 1909년 페인-올드리치 관세법안이 제정되어 20년 이상 된 해외미술품 수입에 면세혜택을 주었고, 1913년에는 모든 미술품으로 확대하여 해외미술품 수입을 권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악덕 자본가들을 견제하고자 1913년에 연방소득세법이 통과되고, 국세청이 발족했다. 그에 따라 자본가들은 자산을 분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비영리재단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7년 비영리재단에 대한 기부에 면세혜택을 준 연방세입법안의 통과는 기업가들이 수집한 미술품을 미술관에 기증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존 록펠러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미술품 수집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록펠러 2세는 아내와 함께 미술품을 수집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페인-올드리치 관세법의 영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 재벌들 사이에서 미술품 수집이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소비의 한 행태로 유행했던 면도 있다. 미술품 수집을 이렇게 경제적 가치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당대 대부분의 수집가들과 달리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과 유망 작가를 발굴하려는 의지를 지녔던 사람, 록펠러 2세의 부인 애비 록펠러였다.

애비 록펠러의 아버지가 바로 페인-올드리치 관세법안을 입법한 로드아일랜드주 상원의원 넬슨 올드리치였다. 올드리치 가는 대대로 미술품을 수집했고,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를 후원하였다.

이런 가풍으로 인해 그는 과시적 소비가 아닌 진정한 후원자로 미술품을 수집하였다. 그는 동시대 유럽 미술뿐만 아니라, 당시 외면당하고 있던 젊은 미국 작가들에게 작품을 직접 주문하여 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고자 했다.

1929년 애비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뉴욕현대미술관을 설립하였다. 뉴욕현대미술관이 들어서기 전에 미국인들의 유럽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는 극히 낮았다. 무지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애비 록펠러 ‘미술 대중화’ 선도 역할

결론은 전시와 교육을 통한 ‘미술의 대중화’였다. 더불어 열악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창작에 매진하는 무명의 젊은 미국 작가를 발굴해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는 법인 설립 신청서에 “뉴욕시의 근대 미술관 설립과 관리, 현대미술의 연구와 제조업, 실생활에서의 응용과 장려 그리고 대중교육 제공”이라고 적시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의 대중화는 단숨에 이뤄지지 않았다. 1936년 뉴욕현대미술관의 기획전 ‘큐비즘과 추상미술’에 출품작 상당수는 유럽에서 대여한 작품이었는데, 또다시 세관에서 작품이 아니라며 무관세 통관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애비의 바람은 1929년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알프레드 바에 의하여 1967년 그가 은퇴할 때까지 구체화하였다. 바가 있었기에 MoMA의 정체성-순수미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각 매체를 포괄하여 수집, 연구, 전시하고 교육하는 미술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물론 애비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미술관을 통해 미술의 대중화를 간접 후원한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록펠러 가문 외에도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유대계 여성 수집가이자 후원자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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