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준
CM병원 내과, 시인, 수필가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감싸고 새해를 맞는다. 마스크는 가면, 복면, 탈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면 가려지고, 덮이고, 자기의 정체가 감추어져 딴 모습으로 차려진다. 입모양도 보고, 입꼬리의 높낮이도 재고, 코끝 찡그림도 뺨의 색깔도 눈치 채야 어림이라도 할 텐데. 영상회의라도 할양이면 본디를 가린 모습에 영상 처리를 덧대어 마주하니 때론 앞뒤가 틀어지고 갈피가 헝클어지기 십상이다. 어떤 이는 이 어처구니없음을 뉴노멀이라며 새로운 눈썰미의 평범치가 정립될 것이라 한다.

기대한다. 그런데, 정립까지 어찌 기다릴까? 옥처럼 부서져 기꺼이 목숨 바칠 옥쇄(玉碎)나 헛되게 비실댈 와전(瓦全)으로 살아갈 요량이 아니어서, 마스크 뒤에 숨어 빼꼼히 눈만 내민다. 내민 눈으로 손때 먹인 독서 노트를 펼친다.

어느 날 아침, -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자기의 진찰실에서 나오다가 층계 한복판에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밟을 뻔했다. 그는 즉각, 아무 생각 없이 그 쥐를 치워버린 다음 층계를 내려왔다. 그러나 거리에 나왔을 때, ‘쥐가 나올 곳이 못 되는데….’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수위에게 주의를 주었다. <『페스트』 알베르 까뮈/유혜경 역>

곧이어 도시엔 페스트가 널리 그리고 독하게 돌아 퍼져, 도시는 봉쇄되고, 모든 소통이 끊기고, 혼란스러운 허탈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깊어진다. 하지만 ‘자기들의 습관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이 미친다든가하는 데에 특히 민감’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선뜻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각자의 이성으로 따져볼 때 도저히 조리에 맞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리외는 그 현실과 부조리를 단호하게 인정하고 의료자원봉사대를 조직화하여 페스트와 맞서 대결한다. ‘죽기 싫은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힘이 있는 한 죽음과 싸우기 위해서’, ‘한없이 패배를 당해도 대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맞서 싸운다.

소설은 ‘사회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까뮈의 생각을 드러내며 끝난다. “또한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나 순수건, 또는 휴지 같은 것들 틈에서 참을성 있게 살아남아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음>

결코 끝날 수 없는 죽음의 전염병. 살기 위해 맞서서 싸우고 버티는 유한한 수명의 인간, 의사 리외의 의지. 인생의 의미를 못 찾아 허망함을 까뮈는 부조리라 했다. 낯설고 어이없을수록 부조리를 더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 리외를 까뮈는 ‘부조리 인간’으로 설정했다.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 의식이 깨어 있는 인간이다.

돌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우리의 동선을 보고 있는데, 우리는 상대방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일방적 비대칭이다. 우쭐대던 최첨단이 느끼고 겪는 어처구니없음이다. 게다가 코비드19란 말속엔 ‘과학이 거기에 담으려고 했던 사실이 내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련의 이상한 갖가지 환영의 긴 행렬도 들어 있다.’<위와 같음> 어쩌면 지금 줄 잇는 추상적 환영만을 쳐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추상을 보고 있는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보고 있었다.’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리는 분명히 맞아떨어지는 보편 불변의 현실이고,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경황이라도 부조리 인간은 있다. 그렇다, 입과 코는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부조리 인간 시늉이라도 내어 진리 하나를 바라본다. ‘새해 동녘엔 새해가 태연히 떠오른다.’

- 유형준 CM병원 내과, 시인, 수필가 / 의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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