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6>

미술과 국가 이념 그리고 정치 Ⅱ

[의학신문·일간보사] “… 여러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zis)이 힘을 얻기 전에도 모던아트라고 부를만한 것이 독일에 있었습니다. 새로운 예술이 매년 나타났고,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독일의 예술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한 가치를 가진 그런 예술 말입니다. …광기와 정신질환이 새로운 개념으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동포들을 덜떨어진 바보로 보는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 이 경우 범죄행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예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떻게 영혼을 울리고, 어떻게 예술적 재능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려면 예술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

살아 있는 화가 가운데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작가로 알려진 독일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생애를 각색한 영화로, 지난 2월에 개봉한 ‘작가 미상(Never Look Away)’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는 1937년 어린 리히터가 이모와 함께 독일 나치스가 개최한 ‘퇴폐미술전’을 보러 가서 전시 안내인으로부터 ‘퇴폐미술’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소련은 이념과 체제에 큰 차이가 있었지만, 연합하여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 맞서 반파시즘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45년 종전 직후 형성된 냉전 상황 하에서 미국은 동맹국 소련을 자신의 주적으로 삼았고, 교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우방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체제는 한 층 더 견고해졌다.

사회주의리얼리즘-추상표현주의 대결

미술 또한 소련의 사회주의리얼리즘 화풍과 뉴욕화파라 불리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대결하는 양상이 되었다. 하지만 뉴욕화파의 형성은 냉전체제의 결과라기보다는 1·2차 세계대전이 주된 원인이고, 냉전체제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나치 치하에서 반유대주의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토대로 한 전체주의가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75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문화적으로 유럽에 낙후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순채무국가에서 순채권국가로 전환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 미술시장도 급속도로 성장했다. 유럽 화상들은 미국 시장개척에 공을 들였는데, 경제 활황에 힘입어 탄생한 록펠러와 모건 같은 재벌들이 사립미술관을 건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에서 비롯된 모순들이 축적되어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주가 폭락과 함께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는 순식간에 전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엄청난 배상금으로 어려움을 겪던 독일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본가들의 지지에 힘입어 집권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 미술계는 유럽화단의 중심이었던 파리와는 다른 방향에서 현대미술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파리의 전위미술이 인상파 이후 세잔을 거쳐 입체파와 야수파 같이 삶과는 거리가 있는 형식적인 관점에 치중하여 전개되었다면, 독일은 작가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 했다. 이러한 차이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이성에 기반한 계몽주의가 득세했지만, 독일에서는 ‘질풍노도’ 같이 격정적인 낭만주의가 태동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까지 다리파, 청기사파, 다다, 신즉물주의와 같이 개인의 경험 표현을 중시하는 미술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1919년 미술과 공예를 결합해서 조형예술 교육의 한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에는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를 위시하여 칸딘스키, 폴 클레 등 당대의 전위적인 화가와 조각가 다수가 참여했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다리(Die Brücke)파는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의 시초라 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화가로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가 있다. 다리파 작가들은 모든 회화적 요소(선, 색, 형태)를 감정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화가의 내적 자아 혹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형태를 왜곡했다. 특이한 점은 그들 대부분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시대정신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했다. 당시 독일은 19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산업화하며, 여러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술을 위한 미술이 아니라, 사회 참여적인 미술을 지향했다.

청기사파는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1911년 뮌헨에서 결성되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해체되었다. 그들은 다리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을 중시하였다. 차이점이라 하면 좀 더 자신에 치중하여 상징적인 의미에서 색채를 중시하였고, 내적 필연성에서 비롯된 심상을 표현하고자 함으로써 점차 추상화로 발전하였다. ‘청기사’라는 명칭의 유래는 칸딘스키와 마르크 둘 다 파란색을 중요한 표현 요소로 사용한데다가, 단체 결성 전 말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있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칸딘스키는 1903년 백마 탄 청기사를 그렸고 마르크는 1911년 파란 말을 그렸다.

표현을 강조한 다리파와 청기사파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등장하였다. 전쟁 중에 ‘어린아이가 타고 노는 목마’를 의미하는 다다(DADA)가 등장하였고, 전후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는 신즉물주의가 등장하였다. 목마가 내포하는 바와 같이 다다는 전쟁의 참화로부터 비롯된 무의미함에 기반한 미술 그룹이라면,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는 전후 ‘황금의 20년대’에 등장한 하나의 경향이었다. 즉물(卽物)이란 어떠한 주관과 선입관 없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뜻으로, 즉물주의 그림은 이렇게 파악한 대상을 명확하게 재현했다. 이러한 점에서 표현을 중시했던 다리파나 청기사파 그림과는 다르다. 실제로 그들은 전쟁 전에 형성되었던 화파들이 과도하게 주관적인 표현으로 기운 것에 대해 반발했다. 하지만 그들도 재현적인 그림을 통해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대표적인 화가로 오토딕스가 있다.

히틀러 집권 후 ‘즉물주의’ 사회악 규정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였다. 미술대학을 두 번 낙방했던 히틀러는 그런 그림들을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퇴폐미술’이라 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모아 1937년 뮌헨을 시작으로 1941년까지 12회에 걸쳐 전국 순회전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이 퇴폐 미술로 간주된 이유는 나치스가 추구한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기반한 전체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다양성을 추구한 표현주의 작품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퇴폐미술가들이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변형해 그린 인물은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전쟁 비용이 필요했던 나치스는 독일 박물관과 화랑이 소유하고 있던 현대미술 작품을 몰수하여 그중에서 고가의 작품 125점을 전쟁 발발 직전에 스위스 루체른에서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매에 나가지 못한 수많은 작품들이 불태워졌으며, 요행히 화마를 피한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1940년 전후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치가 퇴폐미술전 명단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 금지했기 때문에, 명단에 오른 화가들이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독일을 떠나거나, 나치가 지향하는 미술을 따라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림을 포기해야 했다. 1932년 나치에 의해 폐교된 바우하우스 교수들은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파리가 점령되자 초현실주의 화가를 포함한 많은 수의 작가들이 미국, 그중에서도 특히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그로써 뉴욕화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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