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16>

[의학신문·일간보사] 18세기를 대표하는 의사 문인으로 존 키츠,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함께 반드시 거명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조지 오웰이 스코틀랜드 최고의 소설가라 칭송했던 외과의사 토비아스 스몰렛(Tobias George Smollett, 1721-1771)이다. 특히 피카레스크 소설(picaresque novel, 악당소설, 악한소설, 건달소설)의 전통을 이은 소설가로 인정받고 있다.

토비아스 스몰렛 (출처. Wellcome 컬렉션 갤러리)

스코틀랜드 덤바튼(Dumbartonshire)에서, 아버지가 판사이며 지주인 유복한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덤바튼 문법학교를 다닌 후, 글래스고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학생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동기생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정식 의학 학위는 꽤 시간이 지난 1750년에 애버딘의 마리샬 대학에서 받았다. 늦어진 정확한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의사로서의 이미지 개선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발표한 <물의 외용(外用)에 관한 논문>(1752)과 <치골 관절 분리> 두 논문 중에서 후자는 『조산(助産) 이론 및 실습에 관한 논문집』에 채택되어 실리기도 했다.

1739년 글래스고에서 수습 외과의로 잠깐 일한 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잠시 후, 경제적 이유, 애국심, 세계를 보고 싶어 하는 십팔 세 청소년의 모험심,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스몰렛은 자신의 의학 지식과 경험을 해군에서 활용하기로 했다. 1740년 해군 호위함에 승선하여 외과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해군에서의 경험은 첫 소설 『로더릭 랜덤의Roderick Random의 모험』(1748) 등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제대 후 자메이카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나 런던으로 돌아와 다우닝가의 외과의사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생활은 여러 면에서 번창하지 못했다. 수입을 벌충하기 위해, 또한 문학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문학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살에 익명으로 『로더릭 랜덤의 모험』(1747)을 출간했다. 작가는 스코틀랜드의 악당 로더릭 랜덤의 삶을 좇아 그리고 있다.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주인공은 해군 외과 군의관이 되어 바다로 간다. 험한 곡절 속에 세계를 여행하며 오랫동안 헤어졌던 아버지를 만나고, 진정한 사랑과 결혼도 한다. 소설 속에 녹아든 스몰렛의 다양하고 넓은 관심사, 점액질의 스코틀랜드 성격, 독하고 통렬한 풍자, 강렬한 희화화는 대중과 비평가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첫 소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 왕립의과학 아카데미 의사학회장이었던 에드거 언더우드의 말처럼, “의학에서 문학으로 경력을 전환하면서, 스몰렛의 교육과 초기 의학 경험이 그의 글의 본질적 중추인 정확한 관찰과 핍진한 서술에 기여했다.” 평자들은 스몰렛의 전업을 ‘의학계의 상실은 문학계의 이득이 되었다.’고 이른다. 결국, 의사로서의 시들함은 궁극적으로 문학의 변장한 축복이었다.

마흔 살쯤 천식과 과로로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외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스몰렛은 기후 변화가 그의 몸과 마음을 모두 회복시키길 바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향했다. 수년 후 런던으로 돌아와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1766)을 냈다. 처음엔 프랑스인의 외국인에 대한 혐오적 묘사로 인해 비난을 받았으나, 얼마 안 있어 자신의 경험과 프랑스에서의 삶에 대한 세미하고 진솔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오십 년 삶을 마감하기까지 글을 지었다. 의학과 관련된 구절들로 채워진 그의 작품들은 이백오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독자들에게 독특한 흥미를 선사하고 있다.

『로더릭 랜덤의 모험』 서문에서 악당소설 작가 스몰렛의 생각을 듣는다. “삶의 변덕스러움은 그의 독특한 상황에 표출하여 재치와 유머를 위한 넉넉한 장을 펼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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