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순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교수
아프리카·아시아 희망연대 대표

[의학신문·일간보사] 오래 전 내가 발 딛고 있는 정글같이 복잡한 이 지구 어디에서도 혼자라고 느꼈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보아도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아득히 멀기만 했다. 삶 자체가 무기력, 무가치, 무의미로 가득했다. 왜 살아 숨쉬고 있는지, 일은 해야 하는지, 공부는 해야 하는지, 심지어 꼭 먹어야 하는지? 이 왜? 왜에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실존적 공허였다.

성당, 수도원의 수많은 시간의 기도, 묵상, 관상, 명상, 영적지도자 면담 등 다양한 시도 후에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이 증상이 옅어지고, 덜하기도 더하기도 하면서 때론 불안과 우울 상태를 경험했다. 아니, 항상 불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이런 느낌이 계속된다면, 삶 목표와 의미에 대해 촘촘히 살펴야 할 시점임을.

삶의 의미를 찾을 겨를조차 없이 졸업과 외국 취업, 결혼과 출산 후 막 걸음을 떼는 아이 그림책을 사기 위해 들른 한 서점에서 놀라운 책을 만났다. ‘놀랍다’보다 더 강력한 단어가 있다면 그 표현을 쓰고 싶다. 책 표지 맨 위에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라는 문장이 충격이었다. 책 제목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였다.

이 표지 문장에 자석에 끌린 듯 빠르게 읽었다. 하룻밤에 읽기에 그리 많은 양도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충격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버릴 수 없었던 의미가 절대 극한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이.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통찰이었다. 내 이 고통쯤이야… 자괴감마저 들었다.

내 삶 기대는 컸지만 찾은 의미는 먼지보다 못했고, 그의 삶 기대 그 이전에 의미가 하늘보다도 컸다. 1944년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돼 노역을 했다. 이전 연구했던 심리, 정신의학 관련 원고 압수를 피해 숨겼고 분실했다. 이에 백지에서 오롯이 수용소 경험 기반 신이론 설정을 원했다.

이 이론이 프로이트, 아들러와 함께 빈의 3대 정신의학 이론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 시작이었다. 수용소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아남는 이는 육체적으로 강한 이가 결코 아님을 알게 됐다. 살아남느냐는 개인의 내적 힘, 즉 아우슈비츠 경험조차 생존에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니체 말을 인용 “삶의 이유가 있는 사람은 삶에서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낼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로고테라피 핵심 개념이다. 기본 원칙은 인간의 자유의지(Freedom of Will, 선택의지), 의미에 의지(The Will of Meaning), 삶의 의미(Meaning of Life) 세 가지이다.

현재 삶에 공허와 고통이 있다면, 자기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재조명하고 깨달아야 할 시점이다. 내게 없는 그 무엇보다, 있는 그 무엇에 더 가치를 부여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 고통을 성취로, 부족함․죄책감을 성숙할 기회로, 삶을 일회성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인센티브를 찾고 성숙․최선 행동을 선택하는 비극적 낙관(Tragic Optimism)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은 고유하고 특별한 영적(Spiritual)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기와 거리두기(Self_Distancing, 자기 객관화),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 이타적 사랑과 나눔)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이미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 최영순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교수 / 아프리카·아시아 희망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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