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5>

미술과 국가 이념 그리고 정치 Ⅰ

[의학신문·일간보사]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두 차례 혁명을 거쳐 근 100년 간 다양한 정치체제와 사상을 실험했다. 결말은 1871년 3월 18일 “자유로운 삶,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탄생한 ‘파리 코뮌’이었다. 이는 역사상 민중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였으나 72일 만에 정부군에 의한 유혈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면서 인류역사상 최초로 노동자와 농민 소비에트(soviet, 평의회)가 연합해 마르크스 엥겔스 이론에 기반한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다.

지리상 러시아는 유럽 최북단에 있는 변방 국가였다. 17세기 표트르대제가 본격적으로 서구화 정책을 펼쳤으나, 19세기 중반까지 농노(農奴)제도와 같은 중세 봉건주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16세기 중반부터 지속된 제정 러시아의 전제적 정치체제인 차리즘은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차리즘은 1904년 러일전쟁 패배로 위기에 봉착한 후, 1905년 제1차 혁명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빵을 달라는 구호로 발화하여 전쟁 반대와 전제정치 타도로 번진 볼셰비키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사상 초유의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무산계급이 지배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탄생은 유럽 모든 나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프랑스대혁명으로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주변 왕국들이 노심초사하며 동맹을 맺어 공화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인 상황과 유사하다. 아무튼 이때까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체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쥔 국가에서 미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나폴레옹 집권 하에서 신고전주의 대두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대에는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풍미했다. 그런데 프랑스대혁명 후 공화정을 거쳐 나폴레옹 황제 치세 하에서는 새로운 국가관의 형성을 위한 신고전주의가 대두하였다. 여기서 고전이라 하면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인데 이 오래된 양식의 새로운 등장에는 몇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에 대한 나폴레옹 개인의 선호와 더불어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을 최고의 장르로 간주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신고전주의 회화는 한마디로 국가 이념을 충실하게 따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후 러시아 미술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

혁명 전 러시아 미술계는 동시대 파리 미술계 흐름을 자기화(自己化)해서 발맞춰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무산계급이 연합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혁명에 동조했던 미술가들은 새로운 혁명 국가 이념에 부합하는 미술을 모색해야만 했다. 따라서 동시대 파리 중심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자기화하고자 한 미술인과 혁명 정신을 고양하고자 새로운 미술을 모색하는 미술인 사이에 갈등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갈등은 1924년 레닌 사망 후 서서히 스탈린 1인 집권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정리되었다. 그 결과는 1930년대 스탈린 체제에서 등장한 관제 선전미술,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이는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의 신고전주의 회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전까지 신생 공산주의 국가 미술계는 ‘실험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따라서 관제 선전미술에 도달하기까지 격렬한 논쟁을 거쳐야만 했다.

스탈린체제 하에서 관제 선전미술 등장

1920년 5월 나르콤프로스(인민계몽위원회) 산하 순수예술분과의 지원으로 미술가, 건축가 음악가, 비평가가 함께하는 인후크(INKhUK)라는 문화예술연구소가 설립되고, 최초의 추상화가인 칸딘스키가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세 가지 강령을 제시했는데, 그 중 기념비적인 예술에 대해서만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그는 이듬해 연구소를 떠났다. 원인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그의 작가 중심 예술관이 혁명에 동조했던 좌익계열 예술가들과 대척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가 떠난 후 인후크 회원들은 구성주의라 불리는 ‘실험실 미술’과 구축주의라 불리는 ‘생산자 미술’로 양분되어 ‘구성 대 구축 논쟁’이 전개되었다. 구성이 예술가의 개별적 취향을 드러내는 무목적인 제작에 중점을 둔다면, 구축은 혁명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여 제작하고자 했다. 구성에 방점을 둔 작가들은 칸딘스키와 같은 아방가르드 전통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반면 구축주의자는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현실 도피적인 행동이나 종교만큼 위험하다. 우리의 사색적인 활동을 멈추고 예술의 건강한 기초(색채, 선, 재료, 형태)를 현실과 실제 구성의 장으로 양도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작품은 하나의 실용적인 사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사물의 경험을 통해 대중 스스로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할 수 있도록 예술을 정치화하고자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예술을 삶 속으로’라는 구호 아래, 스스로 ‘생산주의 예술가’라 부르며, 예술을 노동과 동일시했다.

구축주의의 주요 작가인 타틀린과 로드첸코는 ‘예술가는 기술자가 되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미술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술의 공리성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술이론보다는 재료를 강조하였고, 회화보다는 공간을 조직해 나아가는 응용미술, 조소, 건축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특히 ‘예술가에서 생산자로’라는 인식 전환으로써 기술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험실 미술-생산자 미술’로 양분 논쟁

타틀린의 대표작으로는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강철과 유리를 주 재료로 파리 에펠탑보다 100m 높은 400m로 지을 계획이었는데, 기술을 포함한 여러 문제로 모형만 제작할 수 있었다. 그 기념비는 나선형의 탑안에는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할 목적으로 속이 보이는 큐브, 피라미드, 실린더 그리고 반구와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조물이 아래로부터 설치되어 서로 다른 주기로 회전하도록 설계되었다. 건축, 조각, 회화의 유기적인 종합을 통해 창조성과 실용성을 통합한 새로운 유형의 기념비였다.

순수회화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한 로드첸코는 1925년 파리 그랑팔레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산업 미술전’ 소비에트관에 ‘노동자 클럽’을 꾸몄다. 이는 교육과 오락 그리고 이념의 선전 선동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가구도 용도에 맞게 접거나 펼 수 있게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그들 이념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았다. 로드첸코가 카메라만이 현대의 삶을 실제로 묘사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사진과 영화에 주목했다. 사진과 영화는 카메라라는 현대적인 기계를 사용한 예술이면서, 이념의 선전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험은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채택되기까지 지속됐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의 냉전체제가 성립되었다. 극심한 이념대립은 세계 미술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뉴욕화파가 형성된 것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데, 바로 재현적 그림과 추상화의 대립 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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