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가을은 코스모스와 함께 무르익어간다. 겨울이 힐끔힐끔 가을 영토를 넘보는 계절, 가을이 찾아와서 내려앉은 산자락에서는 가을산이 혼절해 들어간다고 하니…….

단풍과 눈맞춘 계곡, 단풍으로 타들어가는 산은 황홀경이다. 담장이덩굴이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고, 가로수 은행나무도 희끗희끗 노랑색 톤이 짙어 지기 시작하였다. 설악산 단풍소식 조바심이 난다.

긴여름 어렵고, 힘들게 보냈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 했잖은가. 계절은 한단계 뛰어넘었다. 자연은 불꽃놀이 준비를 끝내고 백두대간따라 붉고, 노랗고, 푸르고, 흰불꽃을 잡혀 매일 25km씩 남행한다. 산이 타들어간다.

붉은 폭죽 단풍, 그 불길은 아래로, 아래로 파도를 탄다. 붉은 카펱길 즈려밟고 황홀한 오색 그리운 님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다. 높은 산자락따라 하루에 40m씩 하산하니 설악산은 거대한 단풍 화염에 휩싸였다.

지난해보다 단풍 색깔이 더 곱다. 단풍산의 대명사는 역시 내장산이다.

설악산단풍은 산세닮아 힘있고 곧다.

지리산단풍은 웅장하고 남성적이다. 그리고 내장산단풍은 아늑하고 얌전해서 좋다.

지난 개천절 연휴에는 설악산단풍 산행을 다녀왔다. 설악산 계곡은 서울 종로를 옮겨 놓은 듯했다.

정상에 도착하여 중청, 소청을 거쳐 천불동 계곡을 찾아가려 했더니 서북능선과 희운각코스는 움직이지 않는 인파로 메워져 있었다. 알록달록 등산복차림 행열.

출처: 설악산국립공원

지난 주말에도 강원도 지역을 드라이브하면서 설악산 자락 단풍을 눈에 물이 들 정도로 감상하였다. 2주전 7부능선까지 울긋불긋 오색 모자이크 단풍이 들었던 고지대는 벌써 겨울산이 되어 있었다.

대자연의 ‘오색붓질’ 단풍은 이제 수묵화의 겨울 차비를 하고 있었다.

지리산은 흙으로 덮혀있는 육산(肉山)의 전형이다.

대부분 악(嶽)자 들어있는 바위산은 군살을 모두 뺀 근육질산이다. 설악산은 골산이다. 바위산이다.

“단풍은 설악부터 온다”했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 산이 깊어 골이 크고 길고 깊으면 단풍도 곱다.

산중제일(山中第一) 미인(美人)은 설악산이다. 그 매력 포인트는 바위다.

침봉(針峰)들과 절벽, 암반위로 흐르는 크고 작은 폭포, 바위가 오랜 세월 물에 패어 만들어진 굽은 못 소(沼)와 담(潭), 바위와 맑은 계류, 울창한 숲이다.

설악산은 앙칼져서 더 매력적인 아가씨같은 산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설악산 정상에 서면 많고 많은 큰 산중에서도 가장 먼저 단풍이 오는 산 답게 황홀하고 애잔하면서도 화려한 붉은 물결, 형형색색 모자이크 단풍에 넋을 잃어버린다.

공룡능선, 기기묘묘한 바위 천불동계곡, 다섯 개 연못의 물줄기 이어진 오련폭포, 하늘에 닿을 듯 착각에 사로잡히는 천당폭포, 모두 단풍 별천지다.

대청봉을 뒤로하여 중청 산장지나 중청을 지나가다 소청봉에서 소청산장에 이르는 계곡길, 지금은 철계단으로 발품을 팔게 하나, 설악산의 장엄한 암봉들, 용아장성, 울산바위, 꿈틀거릴 듯 공룡능선은 별유천지(別有天地) 비인간(非人間), 점층가경(漸層佳境)의 설악에 취하고 붉은 가을단풍에 현기증마저 일으키는 별천지다. 설악의 비경이다.

설악산은 한 대수림(寒帶樹林)의 남방 한계선이요, 온대수림(溫帶樹林)의 북방한계선이다.

그래서 단풍은 설악부터 찾아온다.

온대 한대 식물의 보고가 설악이니 설악은 단풍철 이땅의 정수리다.

하늘 가까운 봉우리에는 단풍카펱을 깔고, 산아래쪽에는 푸르름이 더하다.

초록에 지쳐 단풍이 든다 했어도 여름 젊은날의 풍요와 늠늠함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듯…….

설악산 단풍은 오색모자이크다. 점점이 알알이 박힌 붉은색 단풍, 녹색 솔잎은 황갈색 솔잎을 달고, 검푸른 빛이 도는 겨울소나무가 되어 간다.

높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우뚝 선 솔잎은 단풍색을 돋보이게 만든다.

오색골을 따라 설악에 오르면 그 중간 지점엔 설악폭포가 물소리 요란하게 살아 숨쉰다. 그 골짜기는 계곡산행의 최적지다.

울울창창 짙은 숲속에는 뼈시린 청정계류가 흐르고, 점입가경의 골짜기에 심산유곡이란 말이 적절한 표현이다.

기기묘묘한 바위가 솟구쳐 갈 길을 붙잡고, 폭포수 양쪽 골에는 깎아지른 병풍바위 기가 살아있고 몇군데 넙적바위, 누운폭포 때마침 가을비답지 않게 많이 내린 가을소낙비 덕택에 폭포가 살아났다.

한여름의 찬란한 영광, 가을 아름다운 색깔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앙상한 가지 떨고 서 있는 겨울산이 찾아온다.

겨울산 겨울나무가 되어야 성장은 정지되고 휴식기에 들어가니 나이테는 한 살 더 먹고, 단단해진다. 겨울산은 나무의 내면적 성숙기다.

색색모자이크, 노란색 카로틴, 크산토질에 붉은색 단풍은 안토시안이다.

단풍은 말기(末期)의 색감(色感)이라 했다. 허전하고, 안타깝고 측은하다. 나무가 잎과 이별하기 위한 행위다. 바람불어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내리는 철이되면 겨울나기 준비에 들어간 나무는 잎을 떠내 보낸다. 단풍은 나무에 매달려 흩날리면 낙엽이다. 겨울이다.

어찌하여 나무들은 일년에 한번씩 우리 마음을 서글프게 만드는가.

산은 불타오르듯 붉어졌다.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쓸쓸해진다.

단풍은 곧 사라져갈 것들이 남기고 가는 선물이다. 한해에 한번…….

사라지는 것은 애잔하고, 저무는 것은 아름답다 했다. 떠날시기를 알고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 한다. 그것은 장엄한 자연의 이치다.

가을은 화려하지만 쓸쓸하기도 하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낙엽은 생명쇄락 허망한 인생을 닮았다.

단풍은 나무의 체념이요, 슬픔의 표현이다. 멋지게 살아온 한해 마지막 축제다. 엄동을 이겨내고 저 스스로 다짐하는 축제다. 시련을 이겨낸 자리에서 새꽃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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