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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학 교수를 꿈꿨던 바이마르의 별 실러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14>
 

[의학신문·일간보사]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제4악장은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노래한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낙원의 딸들이여,/우리는 빛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간다,/성스러운 신전으로!/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킨다./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 실러(오른쪽)와 괴테 동상(출처. Wikimedia Commons). 동그라미 안 실러.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독일어: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 1759년~1805년)는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철학자, 역사가, 문학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년 시절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삶이 뒷날 작가 실러의 삶에 진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 역시 소홀할 수 없다.

실러는 독일 뷔르템베르크공국의 마르바흐에서 육 남매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하급 군의관이었기 때문에 의학은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려 했으나, 영주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명에 따라 열네 살에 마지못해 듀크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실러는 법학에 흥미를 못 느꼈다. 법학을 배우는 동료들을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라며 맞갖잖게 여겼다. 결국, 2년 뒤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나선, 1등급 반에 속하는 등 5년 동안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다. 의학 학업이 끝날 즈음 실러의 꿈은 생리학 교수였으나, 운명은 그렇지 않았다. 엄격한 기숙사 안에서 솟구친 자유에의 동경은 문학 작품을 찾게 했고, 작품을 쓰게 했다. 특히 철학 시간 아벨 교수가 권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충격을 주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오이겐 공작에 의해 슈투트가르트 연대의 하급 군의관이 되었다. 급여와 업무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즈음, 재학 시절부터 써서 자비 출판한 첫 작품 『군도(群盜)』(1781년)가 만하임에서 대단히 성공적으로 초연되었다. 스물한 살의 실러는 작가의 길이 더 적합하지 않은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군도』의 사회비판적 내용에 분노한 공작이 집필활동을 금하자, 실러는 자리를 박차고 문학 창작의 자유를 찾아 만하임으로 도피했다. 스물두 살 후반 1782년 9월 22일 밤이었다. 다시는 진료를 하지 않았다.

실러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영적 본성에 대한 졸업 논문을 시작으로 신체적 행동과 근본적인 성격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탐구했다. 그의 연구는 19세기 내내 독일 심리학 발전에 영향을 미칠 만큼 깊이가 있었고, "실러는 인간의 성격 연구에서 전형적인 의식적 차별에 대한 첫 번째 중요한 시도를 했다.”고 인정받았다. 이러한 탐구를 거치며 실러는 철학과 생리학이 혼합된 의학은 건조한 법학보다 문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당시 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화학에서 구하려는 파라셀수스 등의 의원(醫原)화학(iatrochemistry)자나 데카르트 등의 의원(醫原)기계론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어찌 단 한 가닥의 시선으로 인간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철학과 의학의 혼합이야말로 실러의 문학적 열정을 키운 토양이며, 빛나게 한 불씨였다. 그 토양에서 바이마르 고전주의가 번성했고, 그 불꽃은 바이마르의 별로 빛났다.

바이마르 고전주의는 ‘바이마르의 네 개의 별’ 괴테, 헤르더, 실러, 빌란트가 바이마르에서 활동했던 낭만주의, 고전주의, 계몽주의 시대의 아이디어를 종합하여 새로운 인본주의를 확립한 독일 문학 및 문화 운동이었다. 종종 바이마르 클래식은 시인 친구 괴테와 실러의 공동 창작 기간을 지칭하기도 한다. 생애의 마지막 십칠 년 동안 실러는 이미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괴테와 풍요로운 우정을 쌓았다.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두 거성이 서로 주고받은 문학과 인생의 대화는 『괴테와 실러의 서신』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러는 서른두 살 무렵부터 폐렴과 흉막염 때문에 창작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글을 썼으며 특히 칸트의 영향을 받아 철학과 미학에 관한 시와 논문을 썼다.

실러는 1805년 5월 9일 바이마르에서 마흔여섯 살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교향곡 제9번은 「환희의 송가」의 마지막 부분을 합창한다. “서로 포옹하라! 모든 이들이여!/온 세상 입맞춤을 받아라!/-------/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바이마르의 별 실러, 그 별은 지금도 광채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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