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11>

펜을 들고 ‘성채’처럼 견고한 부조리에 맞서

[의학신문·일간보사] 젊은 군의관들이 전쟁터에서 성경처럼 배낭에 넣고 다니면서 정신적 나침반으로 삼았던 ‘성채(The Citadel)’, 의사문인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 1896-1981)이 영국이 낳은 세계적 가톨릭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기념비적 소설 ‘성채’를 한 번 쯤 읽지 않은 의대생이 있을까.

아취볼드 죠셉 크로닌 박사

‘성채’의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광산회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근무하는 젊은 의사로 규제되지 않은 민간 의료행위의 온갖 해악과 맞서고 있다. 당시 영국의 의료체계는 열악했다. 저임금근로자는 보험에 가입되었으나 가족에겐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아픈 자녀가 있는 가난한 가정은 의사를 찾아갈 여유가 거의 없었다. 개원의사는 환자 1인당 연간 인두세를 지급받았다. 그 결과 의사는 인센티브가 거의 없는 이러한 환자보다 비용을 지급하는 환 자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크로닌은 분노했다. 크로닌은 맨슨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나는 의사로서 불의, 감추어진 비과학적 고집, 속임수에 대해 내가 느낀 모든 것을 썼다. 개인적으로 목격한 이야기 속엔 공포와 불 평등이 세밀하게 적혀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대한 공격이다.”

크로닌은 1930년대에 영어권의 가장 성공적인 소설가였다. ‘성채’는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 영국 의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고 있다. 이 소설은 1945년 영국 총선 결과와 1948년 노동당 정부에 의한 국민 보건 서비스 설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울러 증거 기반 의학 및 지속적인 의학 교육과 같은 현상을 예견하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크로닌은 1896년 스코틀랜드의 카드로스(Cardros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의 가족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아버지는 그가 일곱 살 때 사망했다. 학업 및 스포츠 분야에서 탁월했으며, 글 래스고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카네기재단 장학금을 받았으며, 1919년에 졸업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해군군의관으로 종군했다. 1925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사우스 웨일스의 탄광 소재 병원에 근무하다가 런던으로 이사하여 개원했다. 개원은 잘 되었다. 이즈음 소화성궤양으로 큰 고생을 겪고 나서 어릴 적부터 키워온 소망을 이루기 위해 소설을 쓸 계획으로 의원을 정리하였다.

첫 소설 ‘모자 장수의 성(Hatter’s Castle)‘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모자 장수의 성‘의 인기에 이어 두 개의 베스트셀러 ’별이 내려다 본다‘와 ’성채‘를 썼다. 소설들은 영화로 제작되는 등 크로닌은 부자가 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 지냈고, 이어서 스위스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크로닌은 의학에 대한 소명 의식이 크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한 가지 근거로, 첫 작품인 ‘모자 장수의 성’에 대한 미국 독자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싫어하던 의업을 떠나 내가 사랑하는 글쓰기의 일을 맡을 기회를 주었다.”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크로닌의 소설엔 의학에 대한 애착이 가득하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가난한 가톨릭 장학생 소년들이 종파적 편견을 극복하고 학업 성취를 통해 세상에 진출하기 위해 투쟁하거나, 이상주의적인 청년 의사나 청년 성직자가 돈과 성의 유혹으로 도덕적 균형추를 잃는다. 즉 죄, 죄책감 그리고 구속(救贖)에 대한 가톨릭적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일관된 주제를 인간적 시선으로 거르고 드러낸 문학적 결실에는 십수 년에 걸친 의사 시절의 체험에서 우러난 자서전적 흔적이 또렷하다.

‘성채’를 보아도 그렇다. 세상과 의료계와 자신의 이상적 꿈 사이의 갈등을 통해 상처받으며 성장해가는 재능 있는 청년의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스토리의 전개에 다소 통속적 느낌이 있지만, 초반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상쾌한 감동을 준다. 그 감동에 젊은 의사들은 성채처럼 거대하고 견고한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애를 배낭 속에 짊어지고 전쟁의 포탄 속을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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