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4>

[의학신문·일간보사] 미술에서 추상화(抽象畫)라 하면 ‘대상에서 비롯된 모티브를 포기하고, 순수하게 색과 형태를 통해서만 작용하려는 미술로서, 우리 주변 세계를 재현하는 것을 포기한 그림’을 말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대상을 재현하지 않은 그림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까?

1910년부터 유럽 화단에 어떤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 조형 요소로만 그린 추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화가는 러시아 태생으로 뮌헨에서 활동하던 칸딘스키였으며, 그와 교류하던 러시아의 말레비치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이 비슷한 시기에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미술계의 중심지가 프랑스 파리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들은 주변부 출신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즈음이면 유럽 동시대 미술을 선도하던 파리에서는 이미 현대회화의 출발이라는 세잔을 거쳐 마티스의 야수파와 피카소의 입체파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입체파의 영향 아래, 산업화한 현대사회의 속도에 경도된 미래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유파가 등장했으나 그들의 그림에는 어떤 대상에서 비롯된 구상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따라서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화가들이 파리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활동한 화가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에 중심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흐름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자유롭게 살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실 Theory(이론)의 어원이 ‘거리 두고 바라보기’이지 않은가?

그러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사회 상황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대격변기였다. 한 세기 전 발생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유럽은 과거 체제와 결별하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 유물론에 기반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자본론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발견과 함께 신이 죽은 이후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초인의 삶을 외친 니체 등의 영향으로 점차 세속화되었다. 제국주의가 정점에 다다라, 각국은 이해득실에 따라서 이합집산하는 일촉즉발의 형국이었다. 결국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한 발의 총성으로 인해 4년간 약 100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하는 참혹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 중인 1917년 러시아에서는 노동자혁명에 의해 인류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Wassily Kandinsky, 1910, Untitled (First Abstract Watercolor), Watercolor and Indian ink and pencil on paper, 49.6x64.8cm, Paris, Centre Georges Pompidou

이처럼 과학과 공리에 기반한 물질주의가 인간 사고를 지배하자 이런 세태에 대한 반동으로 신지학(theosophy, 神智學)이 등장하였다. ‘신적 지혜’라고도 부르는 신지학은 그리스어 ‘테오스’(theos:신)와 ‘소피아’(sophia:지혜)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신지학의 창시자인 블라바츠키 여사는 인간 존재의 신비로움을 깨닫고자 했으며,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을 향해 변화하는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진화론적 변화는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혼란기의 격렬한 투쟁을 전제로 하는바, 이는 20세기 초 유럽과 러시아를 지배했던 종말론적 분위기와 상통했다. 따라서 신지학 관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혼란기의 필연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지학은 당시 유럽의 지성인과 예술가들 사이에 퍼져나갔으며,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그리고 말레비치 역시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다.

서양미술사 최초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

추상화를 그리기 전에 이들 모두는 여느 화가들과 다를 바 없이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나, 신지학을 접한 후 그들 그림은 급격하게 변했다. 1910년 서양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는 1901년부터 1904년 뮌헨에서 팔랑크스 미술협회(Phalanx group) 회장을 역임했을 때 신지학을 접했고, 1907년과 1908년 사이 겨울 베를린에 머물 때 신지학자인 슈타이너의 강연을 들은 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모임에도 참석했다. 칸딘스키의 소개로 스타이너의 신지학을 접한 몬드리안은 1909년에 네덜란드 신지학회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다만 말레비치는 스타이너의 신지학 이론을 러시아 풍토에 맞게 변용한 우스펜스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칸딘스키에 따르면 “예술은 동시에 그 시대의 반향이요 거울일 뿐만 아니라, 넓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각성적이고 예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는 통찰한 후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화가가 예전 양식을 무의미하게 모방한다면, 그것은 ‘원숭이의 광대 짓’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는 감성에 절대적으로 충실해서 진정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예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예술가에게는 가슴 없는 머리보다, 머리 없는 가슴이 낫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형태를 단순화하고 피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파리 중심의 동시대 미술을 비판하며, 신지학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예술은 인간 영혼을 발전시키고 순화시키는 데에 이바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성이라 할 수 있는 ‘내적 필연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불변하는 실재를 그리고자 했던 몬드리안

Piet Mondrian, 1915, Pier and Ocean 5(Sea and Starry Sky), 87.9x111.7cm, Charcoal and watercolor on paper, NY MoMA

몬드리안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미술에서 나의 진화 이념이 신지학적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그의 그림 역시 신지학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입체파를 더욱더 궁리해 들어간 몬드리안 그림에서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플러스(+)는 블라바츠키의 신지학 이론에서 인간과 자연 속 실체가 정신에서 물질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순환하는 ‘진화’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 그림 속 +는 남과 여, 물질과 정신과 같이 서로 대립하는 이원론적 요소들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런 그림을 통해 그는 비자연, 비개별성에서 비롯되는 절대성을 추구했으며, 이를 사실성의 참다운 시각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불변하는 실재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추상화는 사상을 수반한 추상의 결과물로 이성적인 회화라 할 수 있다. 그런 몬드리안의 그림을 놓고 칸딘스키는 감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칸딘스키의 추상을 ‘뜨거운 추상’이라 하고, 몬드리안의 것은 ‘차가운 추상’이라 한다.

대상 제거 완전한 추상화를 지향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 1915, Black Suprematic Square, oil on linen canvas, 79.5x79.5cm, Tretyakov Gallery, Moscow

급진적인 말레비치는 몬드리안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그는 “심미주의는 직관적인 느낌의 쓰레기다”라고 했으며, “회화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화가는 과거의 선입견”이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한 그는 회화 자체의 목적을 회화의 존재 가치로 간주하여 대상을 완전히 제거한 완전한 추상화를 지향했다.

그에 따르면 작가에게 필요한 역량은 “형태와 색의 상호관계와 미학적 관심에서 나온 구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게, 속도, 운동 방향에 기초한 구성능력”이다. 그는 참된 실재 세계는 인간의 오성으로부터 해방된 직관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그림을 ‘탈 논리적’ 혹은 ‘초이성적 사실주의’라고 설명하며 ‘절대주의’라 명명했다. 절대주의의 선언문과 같은 작품이 ‘검은 사각형’이다. 블랙홀이라 함과 같이 그림 속 검정은 모든 것, 그러니까 전통의 소멸을 뜻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상의 재현, 공간 그리고 서사 같은 기존의 모든 회화 전통을 모두 거부한 그림이다.

이제 그림은 새로운 눈으로 봐야 한다. 그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그즈음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던 그들은 가장 비인간적인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종전과 함께 이념을 앞세운 냉전체제가 성립되었다. “Quo Vadis, Domine?” 과연 미술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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