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10>

의사와 작가 갈등 속에 글로 빛을 쓰다

[의학신문·일간보사]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인류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 심오함을 시로 표현해 보려 할 때 서정시가 나타난다’라고 정의하는 김재혁 교수는 자신의 저서 ‘서정시의 미학-독일 서정시의 창작과 번역’에 한스 카로사(Hans Carossa)의 말을 옮겼다.

“나의 빛을 꺼내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에 빛을 던져주는 것,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

한스 카로사 (출처: German Culture)

카로사는 1878년 남부 독일의 작은 도시 바드퇼츠(Bad Tölz)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제적·심리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결핵의사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뮌헨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후에 뷔르츠부르크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박사학위를 받고 파사우(Passau)에서 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아 진료했다.

학창 시절부터 괴테를 존경했던 문학소년은 가업을 잇기 위해 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문학 작업을 했다. 서른 두 살에 첫 시집을 내고, 3년 후 일기형식의 산문시 ‘닥터 뷔르거의 종말(Doktor Bürgers Ende)’을 발표했다. 결핵을 앓는 젊은 여성을 사랑한 뷔르거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병을 치료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정성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병으로부터 구할 수 없자 그는 자살을 택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단순치 않은 관계는 젊은 의사의 영혼을 찢어 버렸다.

카로사는 그 단순치 않은 관계를 풀기 위해 자신의 문학적 우상인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시도했던 극단적 해법을 문학적으로 빌려 왔다. 이런 까닭에 ‘닥터 뷔르거의 종말’은 ‘카로사의 베르테르’라고 불린다.

다음해 뮌헨으로 이사하여 의사생활을 계속하며 집필에도 열중했다.

이때 릴케, 헤세, 토마스만 등의 당대 문인들과 문학적 교류를 했다. 릴케는 카로사에게 ‘한스 카로사에게(Für Hans Carossa)’를 헌시하기도 했다. 또한 당대 가장 유명한 오페라 대본 작가 호프만스탈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업자 안톤 키펜버그에게 카로사의 시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편지를 보내어 카로사가 시인으로서 알려지는 데에 결정적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카로사는 1차 세계대전 중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어깨에 부상을 당해 제대했다. 참전 중에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큰 충격을 받고 삶의 더 깊은 신비를 탐구하여 쓴 소설 ‘루마니아 일기’는 독일 밖에서 인정받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뮌헨에서의 의사생활은 순조로워 문학 창작을 무리 없이 병행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문학에 전념해도 충분할 만큼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자 의사생활을 접고 파사우로 이주하였다. 30여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문학 창작에만 전념하다가 1956년 9월 일흔여덟 해 이승의 삶을 마감했다.

자전적 소설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는 카로사는 문학을 통해 의사의 의무와 작가의 책임 사이의 갈등을 탐구했다. 그의 작품엔 의사로서 직업의식과 소명이 담겨 있고, 이를 바탕으로 생명에 대한 애착과 도덕적 고뇌가 낙관적으로 들어 있다. 이승하 시인은 “그의 대표작인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과 ‘젊은 의사의 하루’는 작가이자 의사였던 카로사의 모습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이 작품들에서 창작의 열망에 시달리는 작가로서의 고뇌를 안고 있는 카로사와 환자를 정확하게 진단 치료해야 하는 기계성이 요구되는 의사로서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카로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양자 사이의 갈등은 카로사의 문학 세계를 한층 더 심도 있게 만든다. 한스 카로사는 병의 문제를 통 해 인간의 구 원 의식을 다룬 작가”라고 평한다.

한스 카로사의 일기를 펼쳐 본다. “나는 다시 병원 침대에 앉아 다른 사람의 질 병에 대한 기록을 보 관하고, 진단하고 예후를 가늠하고, 치료를 처방하고, 병록을 작성하고, 밤에 자주 전화를 받고, 때때로 휴가를 떠나고 때때로 몇 구절의 산문을 쓸 것입니다.……나는 의학적인 존재와 계속 연결되고 싶었고, 내가 무언가를 썼다면, 언어를 다루는 것은 내가 수련받은 대로 독약의 정확한 용량을 다루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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