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안치영 기자] 국회에서 때아닌 4가 백신 논란이 불거졌다. 왜 전 국민 독감 예방접종을 시행하지 않냐는 지적이다. 전 국민 통신비 지원과 맞물려 ‘정쟁’으로 비화했다.

야당의 지적에 여당까지 전 국민 접종에 가세하는, 자칫 국회발 포퓰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질병관리청 관계자들은 지난 3차 추경 당시 설명했던 내용, 즉 ‘물량 부족과 접종 시기 지연’ 등의 문제점을 차분히 다시 설명하면서 갈등 구조가 크게 번지진 않았다.

이러한 ‘감당할 수 없는 정책 수립’이 조절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적극적인 전문가의 개입이었다. 백신 전문가들은 전 국민 독감 예방접종 제안이 나오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조목조목 정치권에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질병관리청 관계자들 또한 ‘전문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감사함을 표했다.

이렇듯 의료계, 특히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정부·정치권의 공조는 올바른 정책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전 국민 독감 예방접종의 현실적 어려움을 지적한 강진한 서울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지난 2000년대 스탠리 플로킨(Stanley Alan Plotkin, 1932년생)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명예교수를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현재 백신 분야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스탠리 플로킨 박사는 강 교수에게 ‘연구자의 정책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내내 강조했다. 당시 백신 개발 등 학문적인 영역에만 몰두했던 강 교수는 스탠리 플로킨 교수의 조언에 시야가 탁 트였다고 회고한다.

이후 강 교수는 왕성하게 백신 관련 위원회 활동을 하며 국가예방접종과 각종 백신 관련 정책 입안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명실상부 국내 백신분야 전문가로 손꼽힌다. 이번 독감 백신 이슈 또한 강 교수의 활약을 비롯, 전문가들의 개입으로 의료계 입장에선 '말도 안되는' 정책 하나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의료계는 의대 정원 확대라는 '악법'을 막을 때 '준비된 전문가의 부재'를 경험했다. 결국 귀를 닫은 정부를 향해 의료계는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한 달 넘게 이어진 의료계 투쟁은 의료계와 많은 이들에게 상처의 경험을 안겨줬다.

이렇듯, ‘연구자의 정책 참여’는 정쟁·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준비돼있어야 한다. 신뢰 받는 조언자로 거듭 나기 위해 항상 시야를 넓게 가져가며 국가와 국민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장이 조언이 되고, 조언이 정책이 되는 그런 환경은 학문과 정책을 동시에 고민하면서 쌓아가는 치열함 속에서 숙성된다. 지금은 정부가 귀를 반쯤 닫고 있지만. 의료계의 조언을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은 의료계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숙명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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