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9>

와타나베 소설 공력 원천은 ‘둔감력’

[의학신문·일간보사] “의대생 시절엔 의학과 문학은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후 임상에 익숙해지면서 둘은 꽤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학도 문학도 본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바탕을 둔다. 접근 방법에서 의학은 육체적이고, 문학은 정신적이란 차이는 있지만, 목적하는 바는 똑같이 인간이다.”

일본 대중문학의 가장 권위 있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와타나베 준이치(1933-2014년)의 목소리다.

30대 정숙한 의사 부인과 50대 샐러리맨의 격렬한 불륜을 세미한 심리와 절절한 육체 묘사로 기록한 소설 ‘실낙원(失樂園)’은 출간 즉시 초대박 베스트셀러에 올라 영화와 TV 드라마로 일본 전국에 모방 동반자살 열풍을 일으켰다. “사랑이란 인간의 영원한 테마로 어떠한 형식을 띠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그 무엇이다.”라는 작가의 말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심혜진과 이영하 주연의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다.

일본 삿뽀로 나카지마 공원내에 있는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 입구의 작가 형상 입간판과 와타나베 준이치

와타나베는 홋카이도 출생으로 삿포로 의과대학을 졸업 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모교 정형외과 교실 교수로 근무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사화장(死化粧)’으로 서른두 살에 문단에 데뷔했다. 4년 후 모교 병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살인죄로 고발된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 ‘심장이식’이 의사의 윤리를 둘러싼 논란 속에 휩싸이면서 학내 반발이 심해지자 사직하고 전업 작가로 변신했다. 홋카이도에 가족을 두고 혼자 도쿄로 가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의사의 판단에 따라 인생의 진로가 크게 달라진 환자의 삶을 그린 ‘빛과 그림자’로 나오키상을 받았다.

와타나베 문학의 출발점은 고교시절에 경험한 첫사랑 상대였던 동급 여학생의 죽음이었다. 이때 경험한 공허함은 의대 지망생을 문학 창작의 세계로 이끌어 갔다. 의학을 습득하고 스스로 실행하면서 문학열은 더 타올랐다. 글의 주제와 형식은 초기의 의학적 또는 전기(傳記)적 에서 점차 남녀의 사랑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역시 의학에 바탕을 둔 문학적 표출로 ‘와타나베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정립하며 연이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일본 최초로 서양의학을 배우고 면허를 받은 여의사 긴코 오기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좇아 쓴 ‘하나우즈미(Beyond the Blossoming Fields)’. 의학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품고 있으면서도 문학을 지향하여 혼자 상경을 결심하는 청년 의사의 행로를 그린 자전적 소설 ‘백야(白夜)’. 딱딱한 대학병원에서 벗어나 도쿄 변두리의 개인병원에 근무하게 된 인정미 넘치는 인술 선생님의 진료와 활약을 그린 이색 메디컬 유머소설 ‘사화장(死化粧)’. 유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의 일대기 ‘토키라쿠지츠’. 의학적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다양성, 남녀의 본질적 성과 사랑 등을 역사, 전기, 연애 등의 여러 형식으로 날카로운 심리 해부와 독특한 탐미주의적 미학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노년에도 전립선암과 투쟁을 하면서 노인 시설에서 펼쳐지는 연애를 그린 소설이나 정년 이후 세대의 연애를 응원하는 에세이 등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논리로 나눌 수 없는 욕망과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와타나베가 열정적인 사랑이야기를 꾸준히 이어간 공력(功力)의 원천은 무엇일까?

일흔네 살에 출간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끈 밀리언셀러 에세이집 ‘둔감력(鈍感力)’에서 그 원천을 조금이나마 엿본다.

“예민하고 민감하고 화를 내면 낼수록 나만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모두 무시해라. 잔소리는 흘려듣고, 뒷말은 질투심의 다른 표현이라고 이해하라.”

한 평자는 삶의 조언서 ‘둔감력(鈍感力)’을 한 문장으로 일렀다. ‘의사였던 시절의 수많은 만남과 힘겨웠던 경험으로부터 나온 와타나베류 현명한 삶의 힌트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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