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3>

[의학신문·일간보사]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은 11일 (현지 시각) 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천936만5천 달러(한화 1천968억1천721만 원)에 낙찰돼 기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이 가격은 경매사에 주는 수수료 약 12%를 포함한 가격이다. … 1955년 작품인 '알제의 여인들'은 피카소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동명 작품을 재해석해 그린 15개 연작(알파벳 A~O) 중 마지막 작품 'O'다. … 경매 전 추정가는 1억4천만 달러(약 1천536억 원)였으나 경매 시작 후 11분간의 치열한 전화 경합 끝에 추정가를 뛰어넘는 금액에 낙찰됐다. 낙찰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2015년 5월 12일 인터넷에는 거의 실시간으로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역사상 최고가에 낙찰된 피카소 작품 소식으로 넘쳐났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잠시 후 「역대 미술품 경매가 톱 10은…피카소 작품이 4점」이라는 제목으로 변경한 기사를 게재했는데, 기사 제목만 봐도 역시 그는 천재 화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천재 화가 피카소라고 하니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가 떠오른다. 그의 아버지도 화가였는데, 14살도 안 된 아들의 솜씨가 자신을 능가하자 그는 자신의 붓과 팔레트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만큼 어린 피카소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화가였다.

피카소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화가

피카소는 14살에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 상급반 입학시험을 봤는데, 보통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데 한 달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단 하루 만에 끝냈다고 한다. 16살 때는 스페인 최고의 미술 학교라 할 수 있는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며, 19살에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청년 피카소는 화가로서 낙후된 스페인에서 더 이상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현대미술의 수도였던 파리로 갔다.

“나는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듯이 그림을 그린다. 그것이 완성된 것이든 아니든, 그림들은 나의 저널의 한 페이지들이다. 따라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미래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페이지를 선택할 것이다.” 피카소가 한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오십이 될 때까지 참으로 변화무쌍했다.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돼 가장 친한 친구가 실연의 고통으로 인해 권총으로 자살하자 그 충격에서 비롯된 ‘청색 시대’를 시작으로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모든 것이 낙관적으로 보이던 ‘장미 시대’를 거쳐, 아프리카 원주민미술에 관한 관심과 함께 서구 회화사상 가장 혁명적인 입체파를 시도했으며, 신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까지 그 변화는 참으로 다양했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는 그의 여성 편력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피카소는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와 더불어 여성 편력으로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고, 그 외에 알려진 것만 해도 다섯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는 “섹스와 예술은 같은 것”이라고 했으며 “사랑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청량제”라고 했다. 그는 나이 들수록 젊은 여자와 연인이 되었는데, 팔십에 서른넷의 재클린 로크와 결혼하였다. 천재 화가의 이 같은 여성 편력은 호사가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피카소는 자신의 여인이 바뀔 때마다 화풍의 변화가 있었기에, 많은 미술사학자는 여인이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고도 한다. 그가 단순히 기능적인 면에서의 천재가 아니라 서양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화가로 기록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브라크와 아울러 입체파라 알려진 큐비즘의 창시자가 되면서부터다. 브라크와 같이 그는 ‘풀로 붙인다’라는 의미의 ‘콜라주’ 기법을 도입하여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이 원근법과 명암법을 통한 재현 전통을 거부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추상화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황소를 소재로 한 드로잉 연작과 선재를 사용한 철조 작업 그리고 레디메이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조합한 작품 『황소』 등을 선보이는 등 20세기 전위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피카소에게 영감을 준 화가는 르누아르

천재 화가 피카소는 “가난한 사람처럼 사는 부자가 되고 싶다.”라고 화상에게 말했다. 모순되는 듯한 말이지만 한마디로 그의 희망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피카소에게 영감을 준 화가 중 한 명인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는 “작품의 가치를 말해 주는 지표는 단 하나뿐이다. 작품이 판매되는 현장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르누아르는 작가로서 명성을 쌓기 위해 시장 개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시장 개척과 작가로서 명성을 획득하고 성공하는 것을 보며 피카소도 같은 길을 추구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피카소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전시회 때 좋은 평을 써준 평론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사했으며,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전시 평이 게재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화랑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그는 화랑주가 제시한 구체적인 주제를 수용해서 그에 따른 연작도 그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화상들의 방문을 대비해서, 연인과 함께 ‘작가와 화상’ 역할 놀이를 했다. 즉 화상과 어떻게 대화할지 예상 문답을 해보는 것인데, 이를 통해 화상과의 성공적 거래를 위한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일부 평론가들은 피카소가 쉽게 작품 스타일을 바꾸는 것에 대해 그가 진지한 작가가 아니며, 작가로서 ‘주제 의식’이 부족하다는 혹평을 해댔다. 그뿐만이 아니라 미술사학계에서 작가를 연구할 때 일반적으로 스타일의 변화를 주목하지만, 피카소 경우에는 그의 유명세를 키우는 데 일조한 경제적인 후원자들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그는 이런 비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 생애에 걸쳐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병행하거나, 한 작품에 여러 스타일을 종합해서 그림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피카소는 변화무쌍한 화풍을 지속했지만, 소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평단의 인정과 상업적인 성공을 동시에 추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가 큐비즘을 창시하며 전위적인 화가로 자리매김을 했음에도 ‘천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모티브로 변주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말년의 중요 작품은 더욱더 그러한데, 천재의 전위적인 실험은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피카소는 미술계 모두로부터 인정 받아

한마디로 피카소는 미술계 구성원 모두로부터 작업을 인정받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화랑을 중심으로 한 시장 중심의 미술이 되면서 작가는 단순한 천재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시장을 창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업가적인 혜안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73년 향년 91세로 생을 마감할 당시 피카소의 유산은 자그마치 5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의 성공담은 팝아트의 대명사 앤디 워홀로 이어졌는데 워홀은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라고 했으며, 언론 기사와 평론에 대해서는 “그들이 쓴 내용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마라. 단지 길이로 재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워홀은 사업가답게 자신의 화실을 ‘공장’이라고 했으며, ‘돈’도 그렸다. 이러한 사업가적 면모는 생존작가로 최고 경매가를 경신한 제프 쿤스 등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성공한다는 것은 사회 속으로 동화되는 것이다. 이제 화가로 산다는 것은 ‘작가’와 ‘사업가’ 그 사이에서 선택 사항이 되었다.

참고로 다음은 2015년 5월 11일 기준으로 미술품 경매가 상위 10 작품 목록이다.
1. 파블로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2015년 5월 11일, 뉴욕 크리스티) = 1억7천936만5천 달러.
2. 알베르토 자코메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 ( 2015년 5월 11일, 뉴욕 크리스티) = 1억4천128만5천 달러.
3. 프랜시스 베이컨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2013년 11월 12일, 뉴욕 크리스티) = 1억4천240만 달러.
4. 에드바르 뭉크 '절규' (2012년 5월 2일, 뉴욕 소더비) = 1억1천992만 달러.
5. 파블로 피카소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2010년 5월 4일, 뉴욕 크리스티) = 1억648만 달러.
6.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시' (2013년 11월 13일, 뉴욕 소더비) = 1억544만 달러.
7. 파블로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 (2004년 5월 5일, 뉴욕 소더비) = 1억416만 달러.
8.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남자' (2010년 2월 3일, 런던 소더비) = 1억393만 달러.
9.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차' (2014년 11월4일, 뉴욕 소더비) = 1억96만달러.
10. 파블로 피카소 '고양이를 안고 있는 도라 마르' (2006년 5월 3일, 뉴욕 소더비) = 9천521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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