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7>

국가계몽, 메스보다 펜이 강하다

[의학신문·일간보사]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강의실. 세균학 교실 나카가와 교수는 수업 틈틈이 러일전쟁 관련 영상을 환등기로 보여주곤 했다. 1906년 1월 그날은 중국 동북부에서 벌어졌던 러일 전쟁 장면이 비춰졌다. 장면 중에 러시아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죄목으로 일본군에게 곧 처형당할 중국인 포로 주위에서 무덤덤하게 방관하고 있는 중국인들이 나왔다. 일본 급우들은 동조하는 ‘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 가운데 중국인 유학생은 심한 굴욕에 빠져있었다. 육체적으론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중국인 구경꾼들의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는 결심했다. ‘일반적 의학으론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 필요한 건 영적 의학이다. 진정으로 계몽하고 현대화시킬 수 있는 문학에 헌신해야 한다.’ 주저 없이 1년 7개월 만에 의대를 중퇴했다.

루쉰

‘아 Q 정 전(阿Q正傳)’ ‘약(藥, medicine)’의 작가 루쉰(魯迅·노신, Lu Xun, 1881-1936)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집은 가난했고 치아질환, 위팽만, 장마비, 늑막염, 기관지천식, 결핵으로 평생 고생하였다.

루쉰은 소설가, 시인, 수필가,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필명이다. 무기력에 빠진 러시아 지식인을 그린 투르게네프의 첫 소설 ‘루딘’의 주인공 이름 ‘루딘’을 빌려왔다는 설과 어머니의 성인 루(魯·노)에 자신의 아명인 쉰(迅·신)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루쉰은 ‘우둔하지만 빠르다(愚魯而迅速, 우로이신속)’는 뜻을 줄여 담고 있다.

아Q는 최하층의 일용직 인부다. 아무리 멸시를 받아도 자신은 하찮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얻어맞아도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겼다고 합리화하고 외려 진한 자부심을 챙긴다. 게다가 이겼다는 자기 생각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는다.

루쉰은 아Q의 이런 삶의 방식을 ‘정신승리법’이라 했다. 중국인은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고 이기적이며 외래문화에 무턱대고 배타적이라고 판단했다. 반어법적 승리의 아Q는 중화민국의 공산주의 리얼리즘 작가이며 반봉건주의 루 쉰, 의학을 배웠던 루 쉰에게 비친 중국인이었다. 바로 의대생시절 세균학 강의실에서 본 영상 속의 그런 중국인이었다.

그런데 왜 철학이나 정치가 아닌 문학이었나? 답은 당시 문학적 르네상스 시대를 맞은 일본 내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에서 들어온 문학사조는 일본 문학 전반을 집합적으로 연계시켜 문학적 메시지를 극대화해 사회에 깊은 충격을 주고 있었다.

루쉰은 ‘문학 자체의 힘과 잠재력이 인간의 이해를 바꾸고, 도덕적 철학의 신념을 제압하고, 국가를 움직일 수 있음’을 보았다. 의사 루쉰이 든 메스보다 문인 루쉰이 쥔 펜이 인간의 정신을 더 정교하고 명징하게 해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의대생 루쉰에게 ‘문학이야말로 국가계몽의 진정한 의학이었다.’

루쉰은 정치적으로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았고, 문학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민중에 대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문학관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그 결과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는 작가’로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데올로기 및 문화에 크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어느 늦은 밤, 시인 김광균도 루쉰을 생각했다.

‘노신(魯迅)이여 /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 온 -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김광균 ‘노신’ 뒷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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