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2>

예언은 신과 소통하려는 언어 표현

[의학신문·일간보사=의학신문] “비밀 서재에 밤에 홀로 앉아; / 황동삼각대 놓여 있고. / 여린 불꽃이 공허에서 나와 / 헛되이 믿으면 안 되는 것을 잘 드러나게 한다.” 예언가로 잘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록’ 첫 4행이다.

집필 중인 노스트라다무스(1666년 암스테르담 간행본 ‘예언록’ 속표지)

노스트라다무스로 더 잘 알려진 미셸 드 노스트르담은 1503년 12월 14일, 프랑스 남부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저명한 의사였다. 몽펠리에 의과대학을 졸업 후 진료 활동을 하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마르세유 인근 아장에서 가정을 꾸려 남매를 두었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적극적으로 방역진료에 참여하며, 개인적으로 치료법도 개발하여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흔히 행하던 사혈을 금하고, 청결과 위생을 강조했다. 또한 예방을 위해 원뿔 모양의 코덮개, 장미꽃 성분을 넣은 드롭스 등을 사용하였다. 열정적 활약 덕에 ‘용한 흑사병 의사’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페스트로 인한 아내와 자녀의 사망, 처가의 지참금 반환 소송, 종교재판소 불경죄 소환 등이 잇따르면서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면서 인간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영적 능력 계발에 몰입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슬람 신비주의적 명상에 심취하며 신내림을 받고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쉰두 살이 되던 1555년, 그를 전 세계에 알린 예언시 ‘예언록’을 발표했다. 총 942개의 4행시로 1555년부터 3797년까지를 예언하고 있다.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프로방스 사투리까지 섞어 언어의 순서를 무시한 채 헝클어 썼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독자의 동요를 막기 위해 모호한 방식으로 썼다’고 밝혔지만, 종교·정치적 압박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예언력은 날로 명성이 드높아져 국왕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시의로 근무하던 중 지병인 통풍과 류머티즘이 악화하여 1566년 7월 2일 새벽, 63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묘비문은 재혼한 아내가 썼다.

“여기 유명한 미카엘 노스트라다무스가 묻힙니다. 모든 사람이 판단컨대, 수많은 별 아래, 신성한 그의 펜만이, 미래의 온 세상일을 기록하기에 족했습니다. 62년 6개월 17일을 살고 1566년 살롱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후손들이여, 그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남편에게 하나님의 순전한 은총이 있길 빕니다. 아내 앤 폰세 겔멜.”

‘어떤 바보도 내 무덤을 밟지 못하게 해 달라’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그는 살롱 드 프로방스의 예배당에 수직 자세로 묻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이세욱, 임호경 역)]

노스트라다무스의 시는 예언시다. 시와 예언은 닮은 데가 많다. 모두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로 공감을 짓는다. 공감이 무언가.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일이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어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가. 게다가 발생 근원을 보면 시도 예언도 신과 소통하려는 언어 표현이 아닌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신탁’을 쓴 찰스 워드는 의사 시인 노스트라다무스를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예언시 ‘예언록’은 무엇인가? 노스트라다무스란 누구인가? 많은 사람이 찾으려 했으나 여자에서 태어난 누구도 그 답을 못 찾았다. 지금, 프랑스의 스핑크스가 우리 앞에 있다. 사람의 운명을 수수께끼로 묻는 수수께끼의 인물, 대담하면서 동시에 소심한 사람, 단순하지만 아직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