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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고흐의 예술 지향점은 달랐다!미술,문화로 읽다<20>
 

  후기인상파 세잔·고갱·고흐Ⅱ  

[의학신문·일간보사] 세잔 이후 후기인상파 화가로 20세기 서양미술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화가는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고갱에게서부터 상징주의가, 고흐로부터 표현주의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물론 세잔부터 그랬지만 그들 이후 서양미술은 더는 눈으로 보는 바를 그리고자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자 했다. 바꿔 말하면 그들을 기점으로 서양미술의 관심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로 전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화가 중 고흐가 대중에게 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화가로서 1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고흐는 놀랍게도 900여 점의 유화와 1100여 점의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하여 그는 ‘광기와 열정의 화가’ ‘불꽃 같은 삶을 살며 영혼을 그리고자 한 화가’라 불릴 만큼 짧지만, 격정적이었던 삶이 주목받고 있다.

한편 화가로서 그의 짧은 생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인물이 있으니, 동생이자 화상이었던 테오와 훗날 타히티로 떠난 화가 고갱이다. 동생 테오는 조울증과 간질에 시달리는 무명 화가인 형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형제애로 널리 알려졌고, 고갱은 타히티로 떠난 것보다도 고흐가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자른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로 더욱 더 유명하다.

‘상징주의-표현주의’ 시조로 불려

고갱과 고흐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바와 같이 화가로서 그들의 기질은 너무나 달랐다. 이는 늦은 나이에 화가로 전업한 그들이 그 이전에 너무나 다른 분야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파리의 유능한 주식 중개인 출신 고갱은 1882년 위니옹제네랄 은행 파산으로 촉발된 증시폭락으로 실직하며 처자식을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꿈인 화가의 길을 선택했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목사가 되고자 했다가 꿈을 이루지 못한 고흐는 1881년 스물여덟에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 이전에 이런 상반된 삶을 산 그들이 지향한 예술은 그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전위 화가로서 인상주의 화풍과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이상향을 꿈 꾸며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생전에 널리 인정받지 못했는데, 특히 고흐가 그러했다. 그는 1890년 7월 27일 정신적·물질적 고통 속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만학도-이상향 꿈꾼 것은 공통점

고흐와 고갱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화가의 길에 들어섰으나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 살 많았다. 그리고 고갱은 파리에서 그림을 시작했고, 고흐는 네덜란드 고향 집에서 그림을 그리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잠시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펜 미술학교를 거쳐 1886년 2월 말 파리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화상인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화가가 되고자 했던 자신을 테오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테오의 집에 머물며 그의 소개로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고, 그가 자살할 때까지 후원자를 자처했던 일명 ‘탕기 영감’이라 불리는 물감 상인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를 만났다.

탕기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물감값 대신 그림을 받기도 하고, 외상을 주기도 해 많은 화가가 그를 따랐다. 특히 그의 화방에 가야만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던 세잔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세잔의 작품을 아무도 취급하지 않을 때 그가 유일하게 10년 가까이 취급했기 때문이다. 고흐도 이곳에 들러 세잔의 그림을 봤고, 세잔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세잔은 고흐의 그림을 그저 미치광이의 작품 정도로 보았다고 한다. 이는 훗날 ‘표현주의’라 불리게 될 화풍의 그림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886년 가을 고흐와 고갱은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고갱은 실직 후 처자를 처가인 코펜하겐에 맡겨놓고 홀로 파리에서 화가로서 성공을 꿈꾸며 곤궁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활비도 아끼고 인상파를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모색하고자 6월에 브리타뉴의 조그만 항구도시 퐁타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퐁타방파’라 불리며 윤곽선으로 대상을 그리고 채색하여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구획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후 그것은 주관적으로 파악한 관념을 그림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종합하여 장식성이 강한 상징주의 그림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고갱은 세잔을 매우 존경했는데, 새로운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그는 “이제 세잔의 작품 하나 그려볼까”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고갱은 세잔의 자연에 대한 접근방식보다는 그의 조형 언어만을 채택하였다. 세잔은 이런 사실을 짐작했는지 훗날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칩거하면서도 고갱이 “태평양 너머까지 자신의 소중한 감각을 훔쳐 갔다”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한편 고흐는 조울증에서 비롯된 불같은 성격과 과음으로 피폐해진 파리 생활을 접고 1888년 2월 한적한 남프랑스 아를로 내려가 자연을 그렸다. 그곳에서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화가들이 지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일종의 협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했다. 그 방법은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화상인 동생 테오에게 제안했다. 그러고는 테오에게 그 시작으로 고갱을 아를로 초대하여 자신과 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테오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고갱에게 요즘으로 치면 화랑전속작가 같은 조건을 제시하였고, 고갱은 이에 응해 그해 10월 고흐가 그를 위해 그린 유명한 ‘해바라기’ 등으로 치장한 아를의 ‘노란 집’으로 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물과 기름같이 너무 다른 예술을 지향한 그들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고흐는 흥분하여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극심한 갈등 속에 고흐 귓불 잘라

그들의 갈등은 다름 아닌 그림에 대한 태도, 즉 ‘표현’과 ‘상징’ 중 어느 것에 방점을 찍느냐에서 비롯되었다. 만학도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하고자 고군분투하던 고흐는 마치 ‘스펀지’ 같았다. 하지만 대상으로부터의 느낌을 표현하고자 주관적으로 파악한 관념을 그리려 한 고갱이 자신에게 ‘기억에 따라 작업하라’는 충고를 하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흐는 고갱의 방식을 ‘추상화’라 했으며 잠시 관심을 가졌으나 곧 “마법에 빠진 땅에서 벽에 부딪힌 늙은이 꼴이었을 뿐”이라며 무시했다.

고갱은 당시를 “그의 비판적인 견해 속에서 논리적 이유를 찾아 복잡한 머리를 풀어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그림과 의견 간의 모순을 나로서도 설명할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러한 갈등이 있었으나 그들은 저급한 부르주아들의 취향으로부터 예술가로서 자신의 품격을 지켜 나아가고자 하는 전위 화가들의 공통된 딜레마로 고통을 겪었다. 차이점이라고는 고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림에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면, 고갱은 현실적인 성공에 좀 더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비슷한 선택을 했다. 고흐는 스스로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했고, 고갱은 스스로 원시의 타히티로 유배를 떠났다. 그들 이후 서양미술은 한동안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갈라져만 나갔다. 그럴수록 그들만의 미술이 되었고, 전위 화가의 딜레마는 더욱 더 심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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